[Culture]‘낮술’에 취해보실래요

  • 입력 2009년 2월 6일 02시 58분


우울하지 않은 1000만원 짜리 저예산영화 호평

《애인에게 버림받은 다음 날. 혼자 강원도에 갔다. 소주와 라면과 TV로 하루를 때우고 났더니 허전하고 따분하다. 낮에 담배를 나눠 핀 옆방 여자가 “나도 혼자”라고 했었다. 짐 속에 그럭저럭 내놓을 만한 와인 한 병이 있다. 무엇을 할까. 5일 개봉한 ‘낮술’(15세 이상 관람가)의 개요다. 20세 이상의 평범한 대한민국 남녀라면 한 번쯤 경험해봤거나 들어봤거나 지어내봤을 이야기. 각본 연출 제작 촬영 음악 미술 편집을 겸한 노영석 감독은 상영시간 115분 내내 익숙한 얘기를 맛깔스레 풀어내는 ‘구라’ 솜씨를 뽐낸다. 실연한 주인공 혁진(송삼동)의 친구들은 ‘위로 여행’이라며 강원 정선으로 떠나자고 술자리에서 의기투합한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정선 터미널에 나타난 것은 혁진뿐. 술에 뻗은 친구들을 원망하며 찾아간 펜션에서 만난 여자가 “술 한잔 사 달라”며 추파를 던진다.》

여기까지는 어디에선가 많이 들어 봤던 스토리다. 하지만 예기치 않았던 혁진의 5박 6일 강원도 여행은 개요를 벗어난 시점부터 기상천외한 갈지자를 그린다.

경포대 파도 앞의 컵라면과 소주 한 병. 한겨울 고속도로 위의 히치하이킹. 눈밭 모닥불 위의 돼지고기와 집에서 담근 과실주. 아련하게 꿈꿔봤던 여행지의 풍경은 현실에서 만나보면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빛바랜 트레이닝복과 까칠한 콧수염, 덥수룩한 뚜껑머리 등 백수의 클리셰를 완비한 ‘소심남’ 혁진은 시종일관 심드렁한 얼굴로 죽도록 고생하면서 관객을 키득키득 웃게 만든다.

저예산 영화는 대개 조명 부족 때문에 영상이 어둡다. 색감이 탁해진 스크린에 비친 인물들은 아무리 우스운 표정과 행동을 해도 어쩐지 한구석 그늘이 드리워져 우울해 보인다. 하지만 ‘강원도의 힘’과 비슷한 외형을 가진 이 영화는 억지로 웃기려 하지 않으면서도 분위기를 경쾌하게 유지한다.

영화 중반 어수룩한 혁진은 수상한 남자와 얼굴 반반한 깍쟁이 여자 커플에게 붙들려 여관방까지 끌려가서 술잔을 기울인다. 만취해서 오버하는 혁진이 다음 날 아침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영문모를 얼굴로 눈을 뜨리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예상된 장면에서 감독이 보여주는 것은 우울한 백수의 비탄과 절망이 아니다. 혁진이 온몸으로 보여주는 자학 개그에는 ‘아 뭐 살다 보면 이럴 수도 있지…’ 하는 능글맞은 여유가 묻어 있다.

노 감독은 모친에게 빌린 1000만 원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자신의 경험담을 모아 만든 ‘낮술’은 ‘저예산 독립영화는 우울하다’는 편견을 뒤집는다. 혁진은 궁상맞은 신세를 지나치게 자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애써 꿋꿋한 척하지도 않는다. 술자리에서 늘 인기 있는 친구는 너무 과장해서 웃거나 혼자 우울해하지 않는, 이 영화처럼 차분한 재담가다.

감독 스스로 작곡해 입힌 기타 음악도 맛깔스럽다. 기타를 연주하거나 듣고 있다 보면 문득 곡과 상관없는 다른 생각에 빠지게 될 때가 많다. ‘낮술’은 그렇게 편안하게 딴생각을 즐기며 볼 수 있는 영화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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