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풍속 이야기 20선]<14>장례의 역사

  • 입력 2009년 2월 11일 02시 57분


◇장례의 역사/박태호 지음/서해문집

《“인류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과정을 지날 때마다 치르는 일정한 격식, 즉 통과의례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좁은 의미로는 관혼상제만 해당되지만, 넓은 의미로는 백일과 돌, 생일 회갑 진갑 고희 등을 포함시켜 인생의례가 된다. 인생의례는 모두 당사자를 주인공으로 하며 그의 생각에 따라 치러진다. 반면에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정해진 격식과 다른 사람이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喪)과 제(祭)라는 두 부분이다.”》

고인돌서 왕릉까지 ‘무덤의 변천’

장례 문화 전문가인 저자는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장례 문화가 어떻게 변천해왔는지 살폈다. 또 시대를 거치면서 장례 문화의 변화로 무덤의 형태가 달라지는 양상을 추적했다.

저자는 한국에서 구석기시대의 매장 문화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충북 청원군 가덕면 노현리의 두루봉동굴 유적을 소개한다. 이곳에서 발견돼 ‘흥수아이’라는 이름이 붙은 어린이의 유골이 놓인 상태를 보면 당시의 장례 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사 결과 편평한 돌 위에 고운 흙을 뿌린 다음 아이의 주검을 똑바로 누이고 다시 그 위에 고운 흙을 뿌리고 넓적한 돌판을 덮은 것으로 추정됐다. 저자는 “이 시대에도 죽음과 주검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인돌이 성행한 청동기시대의 장례 문화를 의례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일정한 격식을 지닌 장례의식이 행해진 것으로 확인된다. 고인돌 주변에서 일상용품이 많이 출토되는데 이는 묻힌 자의 영혼을 위해 제사를 지낸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고유의 전통 문화에 중국적인 색채가 강하게 덧입혀졌다. 무덤은 전 시대에 비해 종류가 다양해지고 부장 유물의 수준도 높아졌다. 삼국 시대의 왕들은 장대한 고분을 축조했고 현세의 생활도구를 그대로 무덤에 옮겨 놓기도 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장례 문화는 큰 변화를 겪는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불교가 확산됨에 따라 왕릉이 사찰 주변에 만들어졌고, 화장 장례가 증가하면서 무덤의 수가 감소했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의 장례 문화는 사찰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불교적 의례와 유교적인 절차가 때로 혼합돼 나타났다. 고려 전기에는 절이 상제례를 행하는 장소로 흔히 활용됐다. 절 근처에서 화장을 하고 유골을 수습해 절에 모시고선 예법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저자는 “이처럼 절에서 장례 절차의 대부분과 화장까지 진행된 것을 놓고 절을 우리나라 ‘장례식장의 원조’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고 설명했다.

한 가문이 여러 세대에 걸쳐 같은 묘역에 묘지를 정하는 문중묘지 현상이 나타난 것도 고려 때다. 또 부부를 같은 묘역 안에 함께 묻는 합장이나 같은 묘역 안에 묘소를 달리하는 부장(附葬)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조선 왕조를 주도한 세력들은 상장례를 유교화하면서 화장을 근절시키는 데 가장 신경을 썼다.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대부들은 절에서 승려의 주관으로 장례가 치러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 때는 엄격한 장례 규범을 만들었고, 무덤 속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무덤을 가리키는 이름도 달리 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 왕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은 원(園), 사대부와 일반 서민의 무덤은 묘(墓)로 불렀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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