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때 좌의정과 우의정을 지낸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독살설의 진위를 파악할 만한 내용이 있는가였다. 어찰첩에는 정조가 자신의 병세를 상세히 밝힌 편지가 여러 통 들어 있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심환지 혹은 노론 벽파가 정조를 독살했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역사학계에선 “독살설은 원래 근거가 약한 주장이었다”는 반응이다. 그런데도 그동안 독살설은 대중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팩션(faction·사실에 허구를 가미한 작품)이 있다. 독살설을 제기한 ‘영원한 제국’ ‘조선 왕 독살사건’ 같은 팩션소설이 널리 읽히면서 정설처럼 퍼진 것이다.
팩션 형식으로 정조를 다룬 영화, 드라마에서 정조는 늘 성군(聖君)이고, 개혁군주이며, ‘훈남’이다. 반면 심환지를 비롯한 벽파는 정조에 맞서는 악인으로 묘사됐다.
이번 어찰첩에서 확인된 팩트(fact·사실)를 놓고 한번 보자. 심환지는 하루 편지를 네 통이나 받을 정도로 정조의 심복이었다. 심환지에 대한 지금까지의 부정적 묘사는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높다.
정조는 또 어떤가. 어찰첩에 투영된 정조는 막후에서 신하를 조종하는 술수에 능했다. 다각도의 통신망을 통해 정보수집 및 동향 파악에도 공을 들였다. 정국 장악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스트’의 면모를 지녔던 것이다.
맘에 들지 않는 신하에 대해 ‘호래자식’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욕을 했으며 문체반정을 실시해놓고 정작 자신은 시쳇말을 쓰는 ‘인간적인’ 정조이기도 했다. 팩션이 만들어 놓은 정조의 이미지는 상당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팩션에 대해선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는 반응과 “왜곡된 역사를 전달할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지난해엔 조선 화가 신윤복을 여자로 묘사한 드라마와 영화가 잇달아 나오면서 왜곡 논란이 크게 일었다.
이번 어찰첩 발굴로 인해 팩션의 창작 범위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조 연구의 권위자인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의 말은 그런 점에서 새겨들을 만하다.
“역사소설은 일종의 교재 역할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팩트를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팩트를 왜곡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는 많습니다.”
금동근 문화부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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