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28>

  • 입력 2009년 2월 12일 14시 02분


자연 생태주의와 도시 문명주의의 대립

2049년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페이지 추억'에 대한 경험이 없다. 페이지 추억이란 특정 문구가 책 페이지의 어느 부분에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경험이다. 한 장을 다 읽고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서 얻는 만족감! 그러나 디지털북이 널리 사용되면서 '페이지 추억'은 그저 '잊혀진 추억'이 된 지 오래다.

20세기 사람들은 '매혹적인 도시주의'라는 단어에 대한 페이지 추억이 있다. 페이스 팝콘의 미래예측서 『미래생활사전』에서 '대도시와 소도시'란에 수록된 '매혹적인 도시주의'는 팝콘이 발명한 수많은 신조어 중 가장 매력적인 단어였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매혹적인 도시주의』라는 책에서 히스패닉 계 주민들이 북아메리카 대도시로 유입되는 동안 라틴 아메리카 문화가 대도시 문화를 얼마나 풍성하게 바꾸었는지에 주목한다. 페이스 팝콘은 이 책 제목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다민족의 뒤섞임으로 풍성해진 도시 문화를 예찬하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팝콘의 예측대로 21세기 대도시는 다양한 민족 문화를 끌어안으면서 점점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공간으로 변해갔다. 한 도시 안에서 모든 것이 만들어지고 부딪치고 바뀌고 사라져갔다. 이때 도시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 생동하는 유기체이자 자정능력을 지닌 소우주였다.

산업 발전에 목숨을 걸었던 20세기 거대도시들과는 달리 21세기 특별시들은 자연을 통째로 품에 안았다. 지구를 회생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높아지고 '환경과 더불어 사는 존재로서의 인간' 개념이 유행하면서, 테크놀로지는 최소한 자연을 닮아가거나 아예 자연의 일부로 숨어들었다. 테크놀로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친환경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특별시들은 강을 끌어안고 숲을 가꿨다. '테크노피아'는 더 이상 21세기 도시 문명의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도시는 점점 더 세련되고 매혹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지만 도시민의 생활양식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연으로부터 삶의 철학을 배울 여유가 없었다. 항상 경쟁하는 일상, 문명 이기에 의존하는 삶, 특히 값비싼 로봇에 기대어 게으름을 자랑으로 여기는 부자들, 테크놀로지를 받아들인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경제적 양극화. 도시민들은 '품어 안은 자연' '자연인 척하는 자연'을 작은 위안으로 삼는 비자연인으로 살아가기에도 하루하루가 벅찼다.

페이스 팝콘의 트렌드 예측은 대체로 맞아떨어졌으나 그녀가 만든 신조어는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너무 뉴욕특별시 냄새가 난다고나 할까.

'생활양식 공동체'만은 예외였다. 책이 출간되고 48년이 지났지만 이 단어는 살아남았다. 그녀는 20세기의 혈연, 지역 공동체 구성이 붕괴되면서 미래에는 '가치기준과 취미를 공유하고 동질감을 추구하는 집단'이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제도권 교육을 반대하는 사람끼리, 전통적 가치를 존중하는 보수주의자끼리, 1970년대 락앤롤을 즐기는 사람끼리 공동체를 이룬다는 얘기다.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사람들은 페이스 팝콘이 만든 '생활양식 공동체'라는 단어 아래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옹기종기 모였다.

2049년 서울특별시 정부에게 가장 골치 아픈 생활양식 공동체는 '전통적인 자연 생태주의자' 집단이었다. 그들은 심각한 자연 파괴와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도시 문명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버리고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려는 생태주의를 주창했다. 인간의 삶도 '모든 생명체가 먹이사슬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자연 공간'인 생태계 안에서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지극히 유순하고 맑은 사람들이었다. 특별시와 일반시 외곽에서 자연과 더불어 생활했고 타인에게 생태주의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도시 문명이 '환경주의'라는 근사한 옷을 걸치고 영향력을 확대하자 상황이 급변하였다. 도시에 근거한 환경주의자들은 생활양식 자체를 바꾸는 일에는 무심하였고, '어떻게 과학 기술과 도시 문명이 환경 문제를 유발하지 않으면서 발달할 수 있을까'만 고민했다. 그들의 목표는 '지속 가능한 개발'일 뿐 개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진 않았다.

전통적인 자연 생태주의와 환경주의의 가면을 쓴 도시 문명주의가 선명하게 갈라지는 사건이 2040년 '눈보라 뒤에' 라는 다분히 시적인 이름을 지닌 마을에서 발생했다. '눈보라 뒤에' 마을은 옛 강원도 고성 지역의 왕곡마을을 중심으로 넓게 자리를 잡았다. 한반도 대부분이 일제 통치, 전쟁으로 인한 파괴, 새마을 운동 등을 거치면서 회색빛 도시문명이 덧칠되었지만, '눈보라 뒤에' 마을은 자연과 공생하는 생활양식을 지켜왔다. 마을 주민들은 종종 300년 전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위한 거주지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이중환의 『택리지』를 인용하며 고향을 자랑스러워했다. 참으로 지극한 행복이었다.

2040년, 서울특별시와 일반시가 점점 팽창하면서 도시 문명의 손길이 '눈보라 뒤에' 마을까지 뻗쳤다. 오음산을 비롯한 경치 수려한 봉우리와 송지호 해수욕장을 가까이 낀 이곳에 대규모 리조트와 골프장을 세우고 아시아 최고의 컨벤션 센터를 건립하는 사업이 특별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민간 합작으로 주도된 것이다. 공항이 들어서고 고속 철도를 놓는 계획도 포함됐다.

'눈보라 뒤에' 마을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시위가 시작되었다. 생태주의를 근간으로 삼는 생활양식 공동체들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4년 만에 본 궤도에 오른 '코이브 에코토피아(Co-ev Ecotopia)' 운동의 지지자였다. 8대 째 이 마을을 지킨 김수리 할아버지가 '不可(불가)!' 단 두 글자를 피로 쓰고 음독자살하자 상황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아홉 달이나 계속된 시위는 순박하고 평화로운 주민들의 일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신념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특별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큰 뜻을 접고 '눈보라 뒤에' 마을에 대한 모든 지원을 끊는 범위에서 사태를 마무리했다. 그로부터 '눈보라 뒤에' 마을은 자연 생태주의자의 성지가 되었다. 그들은 땅을 일구고 물고기를 잡고 과일을 재배하면서 자급자족했다. 화학비료 없이 농사를 지었으며 병이 들어도 현대의학에 의존하지 않았다. 식당이나 거리, 집안 어디에도 로봇이라곤 없었다.

마을의 명성이 퍼져나가자, 도시문명에 적응하지 못한 하층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미등록 기계 팔이나 기계 다리를 부착했다가 불구가 된 극빈자들, 유전적 질병에 고통 받는 돌연변이들. 도시문명의 피해자들이 속속 찾아왔다.

마을은 거대한 눈보라에 휩싸인 듯 어지럽고 시끄러웠다.

도시 부적응자의 대량유입은 자연과 더불어 '느린 삶'을 누리던 자연 생태주의자들을 각성시켰다. 마을의 몇몇 젊은이들이 무한 확장되는 대도시 문명의 횡포를 막겠다며 나선 것이다.

그들의 필독서가 『도시의 종말』인 탓에 책의 저자 손미주는 이 그룹의 실질적인 리더로 지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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