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형의 외모는 누구를 닮았던가 我兄顔髮曾誰似
선친 그리울 때마다 형을 보았지 每憶先君看我兄
이제 형이 그리운데 어디서 보랴 今日思兄何處見
의관을 갖추어 시냇물에 비추어 보네” 自將巾袂映溪行
―연암집에 수록된 박지원의 ‘연암에서 돌아가신 형을 그리며(燕巖憶先兄)’》
다반사(茶飯事)는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과 같은 일상을 말한다. 옛 사람에게 한시(漢詩)는 다반사였다. 희로애락을 시로 옮겼다. 조선의 몰락과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쇠락해버린 한시. 한시는 이제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받지만 고려청자가 그러하듯 선조들이 느낀 아름다움이 퇴색되지는 않았다.
이 책은 한시 연구자이자 서울대 국문과 교수인 저자가 말하는 한시의 미학이다. 중국에서 비롯돼 우리 문화로 발전한 한시에 담긴 선조들의 감수성을 작품들을 통해 보여준다.
○ 우리 문화로 발전한 한시에 대한 선조들의 감수성 살펴
저자는 우리 한시의 아름다움을 ‘시 속에 울려 퍼지는 노랫가락’에서 찾는다. 동문선(東文選·1478년 성종 때 편찬한 시문선집)에 실린 정지상(鄭知常·?∼1135)의 ‘임을 보내며(送人)’가 대표적이다.
“비 갠 긴 둑에 풀빛 짙어지는데/ 남포에서 임 보내니 슬픈 노래 일렁인다/ 대동강 저 물은 언제나 다하랴/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푸른 물결 보태는 것을(雨歇長堤草色多/送君南浦動悲歌/大同江水何時盡/別淚年年添綠波)”
저자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며 부르는 노랫가락이 들어 있어 이 시가 절창으로 평가된다고 말한다.
조선 중기 최고 시인으로 불리는 권필(權필·1569∼1612)이 스승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의 무덤을 지나면서 읊은 ‘정송강의 묘를 지나면서 느낌이 있어(過鄭松江墓有感)’도 마찬가지. 권필의 시에는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로 시작하는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 구절이 축약돼 울려 퍼지기 때문에 높이 평가받는다고 한다.
한시에는 점철성금(點鐵成金)의 시학이 있다. 고철을 녹여서 금덩이를 만들 듯이 진부한 표현이나 비속한 단어를 사용해 새로움을 추구하는 방식. 고려의 시인 이색(李穡·1328∼1396)은 시에 속담을 즐겨 넣었고 노수신(盧守愼·1515∼1590)은 조선의 지명을 시어로 사용했다.
허균(許筠·1569∼1618)이 점철성금의 예로 든 ‘신 씨의 정자에서 아우 무회를 그리워하며(愼氏亭懷無悔甫弟)’라는 노수신의 시를 보자. “길은 평구역에서 끝나고/ 강은 판사정에 깊구나”로 시작되는 이 시에는 오늘날 광나루 동쪽에 있었던 평구역(平丘驛)과 근처 한강변 판사정(判事亭)의 명칭이 들어 있다.
○ 조선 후기엔 추사 김정희 등 파격적 아이디어 형상화
현실 풍자와 비판은 고려시대 이후 한시의 오랜 전통.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1794년 11월 정조의 명을 받아 암행어사로 경기 북부 민정을 살피다가 쓴 ‘왕명을 받들고 염찰사로 적성 시골 마을에 이르러 짓다(奉旨廉察到積城村舍作)’는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 놋수저는 지난번 이장에게 빼앗기고/ 무쇠솥은 다시 인근 양반에게 빼앗겼다네/ 닳아빠진 푸른 이불 오직 한 채 남았으니/ 부부유별 그 말 따져 보았자 무엇 하겠나/ …”
조선 초기의 문인 성현(成俔·1439∼1504)도 1483년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있을 때 쓴 ‘벌목행(伐木行)’에서 한겨울에 헐벗고 나무를 베느라 손등이 터져나간 백성들의 참상을 그렸다.
우리 한시에서는 감성을 중시하는 당나라풍과 이성을 강조하는 송나라풍이 번갈아 주류를 차지했는데, 조선 후기 한시에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형상화한 시들이 나왔다.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고향에 있는 부인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고 쓴 ‘유배지에서 처의 죽음을 슬퍼하면서(配所挽妻喪)’라는 시가 그런 경우다. 김정희는 이 시에서 혼인을 관장하는 신(神)인 월하노인을 저승에 데리고 가서 내세에는 아내와 처지가 바뀌도록 하겠다고 표현했다.
저자는 중국 한시가 낭송할 때의 아름다운 울림을 따라가는 데 비해 한국 한시는 더 높은 정신세계를 추구하며 내면의 울림을 지향했다고 말한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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