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날 재수 굿판에서 만나 ‘첫 눈’에 반한 꽃다운 10대들의 사랑, 바로 로묘와 주리의 속사정이다.
7일부터 15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에서 공연된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 작품을 한국판으로 새롭게 선보인 창극이었다.
주인공의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주리’와 ‘로묘’? ‘주리’는 최불립 집안의 따님이고, 로묘는 문태규 집안의 아드님이다. 최불립은 바로 캐플렛 가문, 문태규는 몬테규 가문이다. 동음어를 접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최씨 집안은 전라 남원 운봉, 문씨 집안은 경상 함양의 귀족으로 두 집안은 대대로 원수지간이었다. 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한데 섞이는 무대가 흥미진진하다. 대립인지 화합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풍요롭고 흥겨운 말의 성찬이었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집안의 어린 남녀는 서로에게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린다. 원수라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로묘가 주리의 사촌오라버니를 죽이게 되나, 주리는 사촌의 죽음보다 로묘를 못 보게 되는 게 더 두렵다. 로묘는 결국 살인죄로 유배의 도시 한반도 땅 끝 강진으로 떠나고, 둘은 생이별을 한다.
주리는 로묘가 기관지가 약하고, 비염도 있는데, “강진 해풍은 몸에 해롭대”라며 오로지 로묘 걱정뿐이다. 일편단심 로묘만 생각하던 주리는 로묘를 만나기 위해 무당의 약을 받아 잠시 죽음을 가장한다. 그러나 어둠의 전조는 바로 이때 드리워진다! 서신을 전하러 총총 달려가던 이가 강진에는 도달도 못하고, 지리산 민중봉기에 휩쓸려 관군에 끌려가고 만 것이다. 로묘는 주리가 ‘깨어난다’는 말은 못 듣고, ‘죽었다’는 말만 전해 듣는다.
주리를 위해 따라 죽겠다는 로묘! 약장수에게 약물을 사들고 울며불며 찾아온다. 주리 옆에서 진한 사투리로 “빌어먹을 약장사, 약발 좋다~”라며 결국 죽고 마는 것! 깨어난 주리도 함께 가슴에 칼을 꽂는다. 무대 뒤로 폭포수마냥 물은 한없이 쏟아지고, 둘은 흰색 침대 위에서 안개꽃처럼 잠든다. 주인공의 슬픔과 무대의 아름다움이 뒤섞여, 죽음도 거스르는 거침없는 10대의 사랑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로묘와 주리의 관계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충실했다. 심지어 영어 자막은 각색되지 않고 그대로 캐플렛과 몬테규 집안의 얘기였다. 외국인은 외국인대로, 한국인은 한국인대로 구미에 맞게 감상할 수 있다.
사투리, 비속어 등이 맛깔스럽게 쏟아지는 판소리는 슬픈 장면도 해학적으로 즐기게 되는 매력을 선사했다. 이탈리아 베로나는 호남과 영남이 맞닿은 팔량치 고개로 이동했고, 원작의 신부님은 무당이 됐다. 점, 굿판, 장승 세우기 등 토속 문화를 그대로 살려 한국무대의 재미도 한껏 전달했다.
2009 젊은 창극 ‘로미오와 줄리엣’은 관객들에게 서글픔과 희망을 동시에 선사하며 에너지를 가득 전달한 공연이었다. 공연 1시간 전부터 공연장 로비에 관객이 가득했고, 남녀노소 특정 세대에 국한되지 않고, 관객층 폭이 넓었다. 타 공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알뜰한 2~3만 원의 티켓 값과 ‘재미있다’는 입소문으로 지난 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기와 밟기’, ‘강강술래’ 등으로 관객들이 무대에 직접 참여했고 “얼쑤~”, “잘 한다~”등 추임새를 넣어도 좋다.
‘젊은 창극’ 시리즈를 관람하면, 창극은 명절용 효도선물 공연이라는 편견을 깰 수 있다. 부모와 함께, 친구와 함께 특정 세대와 관계없이 두루 보아도 괜찮다.
다음 작품은 3월 3일부터 8일까지 공연되는 ‘민들레를 사랑한 리틀 맘 수정이’다. 주인공 수정이는 10대에 아이를 낳아 키우는 ‘리틀 맘’이다. 여고생의 임신과 출산을 창극으로 그린 작품이다. 가족 드라마로,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또 한번 실험적이며 흥겨운 창극을 선보일 예정이다. (공연 문의 02-2280-4115)
변인숙 기자 baram4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