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는 물론 현대사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고인은 1922년 대구에서 가난한 집의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신학교인 서울 종로구 혜화동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에 진학할 때까지 신부로서의 삶을 확신하지 못했던 고인은 뒤진 공부를 만회하느라 신학교 3학년 때 읽은 수많은 성인들의 이야기에 뜨거운 감동을 받은 뒤 신부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일제강점기 신학생이던 고인은 졸업반 수신(修身) 과목 시험 때 "조선 반도의 청소년 학도에게 보내는 일본 천황의 칙유를 받은 황국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문제가 나오자 시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릴 무렵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
고인은 신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조치(上智)대로 유학을 떠났다가 1944년 학병으로 징집돼 일본 남쪽 태평양의 한 섬에 있다가 광복을 맞았다. 1946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사제품을 받은 것은 1951년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가난한 집안에 보탬이 되기 위해 장사꾼을 꿈꿨던 소년이 비로소 이날 사제의 길에 들어섰다.
사제 서품 뒤 안동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고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주민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할 정도"로 가난했다. 고인은 특별한 방법으로 주민들을 도왔다. 고해성사를 하며 집안 형편에 따라 주민들에게 돈을 주고 이 사실을 발설하지 못하게 한 것. 고인은 "풋풋한 첫사랑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듯 성직 생활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가난한 신자들과 울고 웃었던 본당 신부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고인은 1956년 독일 유학길에 올라 뮌스터대 요셉 회프너 교수신부에게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고 1963년 귀국한 뒤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을 지낸 뒤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됐다.
고인은 서울대교구 취임 미사에서 "교회가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1998년 사임할 때까지 이 말을 실천했다.
이 같은 신념은 "교회 기원이 세상이 있지 않더라도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만큼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따른 것.
1969년 교황청이 고인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당시 임명받은 추기경 중 최연소(47세) 추기경이었다. 고인은 추기경이 돼서도 인권과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제7대 대통령에 취임한 1971년 성탄절. 고인은 미사에서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 …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이라며 정부를 강력히 비판했다. 훗날 고인은 "그때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 발언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1972년 8월 9일 고인은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7·4남북공동성명이 평화 위장의 전쟁준비 수단이나 권력정치의 기만전술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한다.…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실현을 촉구하고 사회 안정과 질서를 흔드는 비상조치를 남발하는 권력의 폭주를 엄계한다."
고인은 10월 유신 이후 불법단체로 지목된 전국민주청년학생동맹(민청학련)을 조종한 배후로 당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1993년 별세)가 지목돼 체포되는 등 교회와 정부의 갈등이 깊어지자 1974년 박 대통령과 만났다. 박 대통령이 "종교가 정치, 경제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고유 영역에서 벗어난다"고 말하자 고인은 "사람들은 교회가 사회의 어둠을 밝혀주길 기대한다"며 "권력으로 언론 자유를 누르면 오히려 국민의 정부 불신이 심해져 국가안보를 해치는 결과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고인의 적극적인 사회적 발언에 대해 좌경이니 하는 비난도 있었지만 정작 고인은 "격동기를 헤쳐 나오며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은 해본 적 없고 약자들 편에 서서 존엄성을 지켜주려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때는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광주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시국성명을 발표했다. 고인은 "광주 문제를 완곡하게 언급했는데도 동아일보에 단신이 실린 것을 제외하면 어느 언론도 내용을 보도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서울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때도 추모미사를 통해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고인은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한편 시위대에게도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며 각목과 화염병을 버리라고 촉구했다. 고인의 이런 신념과 실천 덕분에 격동기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역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고인은 "명동성당이 치외법권 지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에게 한 뼘 공간이라도 내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인은 "언젠가부터 이익집단들이 장기간 상주하면서 성역을 스스로 훼손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1998년 격동의 30년 세월을 천주교 수장으로 지내온 고인은 76세에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고인은 추기경을 지내며 항상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살고 싶은 열망을 내비쳤고 그러지 못해 답답했다면서 "(추기경이라는) 직책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고 자신을 낮췄다. 가난한 이들의 빛 같은 존재였으면서도 그들과 삶을 나누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진정한 어른이다.
고인은 1998년 명동성당 축성 100주년 경축미사에서 "(명동성당은) 겨레와 기쁨과 고난을 함께 했습니다. 이 사회를 밝히는 빛과 등대로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서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고인의 삶이 그랬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