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 중인 극단 창파의 ‘레자 드 웨트의 세자매’(채승훈 연출)는 골수 연극 팬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작품은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세 자매’(1901년)의 17년 뒤 이야기를 다룬다.
러시아혁명이 끝난 직후 적군 장군과 결혼한 자유분방한 둘째 마샤(손봉숙)가 6년 만에 고향 포조로프가로 돌아온다. 보수적인 첫째 올가(권남희)와 낭만적인 셋째 이리나(윤복인), 그리고 무력한 장남 안드레이(박종상)와 그의 속물스러운 아내 나타샤(소희정)는 이루지 못한 꿈과 사랑에 대한 회한에 젖은 채 마샤를 맞는다. 마샤의 첫사랑 베르시닌(남명렬)은 백군 장군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가 패배한 뒤 가족은 물론 발목까지 잃은 초라한 신세가 됐다.
한때 유부남인 베르시닌과의 불장난으로 집안의 골칫덩이였던 마샤는 이제 몰락한 귀족가문의 생명줄 같은 존재다. 마샤는 베르시닌과의 옛사랑을 그리워하고 그에게 연정을 느끼는 이리나와 묘한 긴장관계에 휩싸인다. 그러나 마샤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남편이 갑작스럽게 숙청당해 다시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가족을 구하는 일이다.
체호프의 작품을 못 본 관객이라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러시아판을 떠올릴 만하다. 포조로프가는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연방 측 오하라 가문을 닮았고 자유분방한 마샤는 스칼렛 오하라를 떠오르게 한다. 베르시닌은 스칼렛의 첫사랑 애슐리를 연상시킨다.
체호프의 작품에 정통한 관객이라면 이 작품에 숨겨진 중층구조를 만끽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여성극작가인 웨트는 ‘세 자매’를 포함해 체호프의 4대 연극으로 꼽히는 ‘갈매기’(1898년) ‘바냐아저씨’(1899년) ‘벚꽃동산’(1904년)의 수많은 장면과 대사를 기막히게 차용했다. 예를 들어 마샤의 귀환을 기다리는 장면은 ‘벚꽃동산’의 첫 장면이고, 3막에서 포조로프가 사람들이 옛 추억을 떠올리며 로또게임을 펼치는 장면은 ‘갈매기’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할 인물은 세 자매가 아니라 베르시닌이다. 체호프의 원작에서 세 자매의 동경의 대상인 모스크바를 상징했던 그는 정작 세 자매가 생존을 위해 ‘환멸의 땅’ 모스크바로 탈출하는 순간 홀로 남아 고결한 품위를 지키며 자결을 택한다. 베르시닌을 연기한 남명렬 씨는 비록 뜨거웠던 동경이 아련한 추억으로 잊혀지더라도 그 추억이 있는 한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는 점을 가슴 뭉클하게 보여준다. 반면 부친상을 당한 뒤 1년여 만에 무대에 돌아온 배우 손봉숙 씨의 마샤는 정확한 발성과 연기에도 불구하고 대형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를 뿜어내진 못했다. 22일까지(02-762-0810). 2만∼4만 원.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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