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이성끼리 사랑? 그건 금기예요”

  • 입력 2009년 2월 20일 02시 56분


《하이, 안녕 나 자나야. 내가 누구냐고. 어머, 실망인걸. 하트빌고등학교 최고의 중매쟁이 마술사를 몰라보다니. 음, 그렇다고 내가 ‘러브 포션 넘버 나인’ 같은 약물을 쓰는 건 아니고, 두 사람의 사랑이 싹트도록 그 과정을 용이하게 해주는 정도지. 우리 학교에서 내 도움 안 받은 커플은 없다고 봐도 돼. 학교 최고 인기스타인 체스챔피언 마이크가 내 도움 없이 풋볼팀 새 쿼터백 스티브랑 사귀어 보려다가 포기하고 결국 나를 찾아왔지. 학교 코치님들과 마을 경찰관 아저씨와 의사선생님도 짝지어드렸어. 실패한 경우는 없냐고? 만난 지 하루 만에 불꽃을 튀긴 로버타와 칼라 커플이 하루 만에 쫙 찢어진 적도 있었어. 그래서 내가 로버타를 케이트와 다시 연결시켜줬지.》

美고교생들의 발칙한 이야기 뮤지컬 ‘자나, 돈트’

잠깐, 커플 이름이 왠지 이상하다고? 어머 웃긴다, 그럼 남자가 남자랑 사귀고 여자가 여자랑 사귀지 남자와 여자가 사귀겠니? 뭐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라만 우리 학교에서 이성애 커플을 본 적은 없었어. 학교 연극반에서 군대 내 이성애 문제를 충격적으로 다룬 뮤지컬 ‘남자가 되거라’를 무대에 올리기 전까지.

이 작품에서 남녀 이성 간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연기한 스티브와 케이트가 진짜 사랑에 빠지고 말았지 뭐야. 학교는 벌컥 뒤집어졌고 견디다 못한 둘은 야반도주를 하겠다고 내 집에 나타난 거야. 어떻게 해야 하지. 마법책을 뒤지던 나는 해법을 찾아냈어. 그런데 부작용이 너무 크네. 사람들이 패션감각을 잃게 되고 나도 자칫 마술능력을 잃을 수가 있대. 어쩌나.

안녕하세요, 전 하트빌고교 공식DJ 탱크입니다. 지금까지 자나의 이야기는 7일부터 세종M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자나, 돈트!’의 줄거리죠. 자나가 극을 끌고 가는 주인공이라면 전 주로 멋진 목소리로 극 전개를 뒷바라지하는 존재입니다. 좀 더 여유가 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오프브로드웨이에 올랐던 이 작품에 대한 한국 관객의 반응을 살짝 알려드리려고요.

이성애와 동성애만 바꿔놨다고 알고 온 관객들은 이 뮤지컬이 실상 미국 고교생들의 고정관념을 몽땅 바꿔놨다는 것을 발견하고 즐거워한답니다. 근육질 풋볼스타보다 지적인 체스챔피언이 더 인기가 많고, 고교생들이 바에서 주로 우유를 마시다 “센 거 달라”고 하면 아이스코코아가 나오고, 여학생이 황소 타기를 즐기는 거친 스타일이라면 남학생은 TV 보며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식이죠. 동성 커플이 키스를 하는 장면은 좀 불편해하는 것 같았지만 이성애와 동성애를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작품의 취지엔 크게 공감하는 걸 느꼈습니다. 출연 배우들이 골고루 주제곡을 부르며 은근히 가창력 대결을 펼치는 것에 대한 박수갈채도 뜨거웠습니다.

아쉬운 점은 아무래도 미국 대중문화의 맥락을 모르는 관객이 많아 썰렁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겁니다. ‘미국판 나훈아’인 톰 존스를 놓고 “당연히 동성애자 아니었느냐”고 반문하는 장면이나 샌프란시스코를 이성애자의 천국으로 패러디한 장면에서 폭소가 터지지 않더군요. 반면 ‘빨리’라는 노래 속 가사에 김연아와 박태환이 등장하니까 박수가 쏟아지더군요. 앞의 자나 이야기를 듣고 눈치채셨겠지만 뻔한 해피 엔딩으로 갈 것 같던 작품이 눈물 쏙 뺄 반전을 준비했으니 놓치지 마세요. 음, 동성친구끼리 보러왔다가 괜히 게이 커플 아니냐는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조심하시고요. 그럼, 안녕. 3월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M씨어터, 4만∼6만 원. 1544-1555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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