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34>

  • 입력 2009년 2월 22일 18시 21분


[제8장 앵거 클리닉의 난폭자들]

쿼런틴 게이트(Quarantine Gate, 검역통관 구역)는 특별시 경계지의 초승달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안전지대를 벗어났다가 돌아오는 사람과 로봇의 검진 및 방역은 메디컬 존에 속한 쿼런틴 게이트의 고유 업무였다. 하루에도 수십 건 씩 변종 바이러스가 보고되었다. 인체와 기계가 결합되는 지점에서 예상 밖의 발열이 잦았고, 특히 기계와 뇌의 접합점에서 두개골과 뇌막을 뚫고 침입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들이 적지 않았다.

뇌를 다루는 병원이 쿼런틴 게이트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 중에는 의료 로봇만으로 뇌수술이 가능한 병원도 있었고, 뇌를 나노단위로 관찰하여 병의 원인을 밝히는 병원도 들어섰다. 뇌의 신비가 완전히 밝혀질 날이 멀지 않았다는 통합병원장의 인터뷰가 쿼런틴 게이트 입구에 설치된 대형 홀로그램 광고 지역에서 흘러나왔다.

앵거 클리닉(Anger Clinic)은 초승달의 위쪽 끝 그러니까 뇌 통합 병원 중에서도 가장자리에 위치한 단층 건물을 쓰고 있었다. 바로 옆에 들어선 60층 신경정신질환연구소 빌딩에 비하면 철거 예정인 오염 지대의 판자촌처럼 초라했지만, 네 귀퉁이에 기둥처럼 버티고 선 아름드리 소나무엔 진득한 세월의 무게가 담겼다. 햇살이 나뭇가지를 뚫고 지붕에 닿을 때는 바람의 흔들림을 새겨두기도 했다.

미치겠군.

볼테르는 전기자동차에서 내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차라리 돈을 내라거나 몇 대 맞으라는 편이 나았다. 병원에 간다고 타고난 성격이 달라지겠는가.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었다.

지정병원에서 치료받지 않으면 글라슈트의 '배틀원 2049' 출전 자체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정식공문이 조직위원회로부터 내려왔다. 그 동안 시합장에서 폭언을 퍼붓고 기물을 파손하는 볼테르의 모습만 따로 편집한 동영상이 첨부되었다. 팔다리를 부러뜨린 것도 아닌데, 화를 참지 못한 적은 몇 번 있지만, 그 정도야 글라슈트에 몰두하다보면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건물의 겉모양은 허름했지만 내부는 달랐다. 볼테르가 두 걸음을 떼는 동안 신원확인과 무기소지유무, 건강상태까지 점검이 끝났고, 두 걸음을 더 떼는 동안 그와 관련된 텍스트와 사진, 동영상 등의 수집을 마쳤다. 기다리며 섰던 간호원 차림의 안내로봇이 배꼽인사를 한 후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초 검사를 하겠습니다. 캡슐에 편히 누우십시오."

"캡슐로 들어가라고? 난 답답한 건 못 참아."

볼테르가 불뚝성을 냈다.

"캡슐이 불편하시다면 그 옆 의자에 앉으셔도 됩니다. 머리를 휘돌리는 일은 삼가주십시오. 물론 저희 병원 뇌 촬영기기는 웬만한 움직임에도 초점이 흔들리지 않습니다만, 일만 분의 일이나마 오작동이 생길 경우 검사를 다시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정확한 측정을 위해 눈과 귀를 잠시 조율하겠습니다. 좋아하는 음악, 혹시 있으신가요?"

"음악? 그딴 거 몰라."

"알겠습니다. 특별시 인기 음악을 추천해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다윈과 핀치들'이 '보노보' 개국에 맞춰 발표한 스페셜뮤직 '원더풀 로봇 월드(Wonderful Robot World)'가 이번 주 차트 1위곡입니다만……."

눈가리개가 달린 헤드셋을 쓰자 굵고 끝이 흐물흐물 갈라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볼테르는 뇌파 검사가 끝난 후 타원형 복도를 따라서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의자들이 중앙 탁자를 축으로 반원을 그렸다. 함께 치료받기로 예약된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앵거(Anger)!

화를 다스리지 못해 강제로 모인 사람들이다.

너도 그러하냐, 쯧쯧쯧!

불쌍하게 여기는 눈빛들이 편치 않았다. 운동선수로 짐작되는 근육질 청년, 펑퍼짐한 엉덩이를 지닌 중년 부인과 불량기 가득한 열 예닐곱 살 먹은 남학생. 그들과 차례차례 시선을 맞춘 볼테르는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로가 몰려들었다. 밝은 대낮, 병원에 머무는 자신이 무척 낯설었다.

흰 가운 가림에 카이저 콧수염을 기른 노윤상 원장이 방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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