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빈의 언제나 영화처럼] 슈렉

  • 입력 2009년 2월 26일 07시 35분


가끔 제가 ‘피오나 공주’라는 상상을 합니다. 출근하면 마법사 언니들이 저를 기다리죠. 바탕 화장을 하고, 립스틱을 바르고, 눈에 음영을 준 다음 속눈썹까지 붙이면 얼굴은 완성! 거울을 보면 음... 솔직히 제가 봐도 많이 예쁩니다.

드라이를 하고 예쁜 옷까지 입고 밤 9시 로고가 울릴 때면 완벽 변신! 여기다 아나운서로서 프로페셔널까지 덧입히면, 집에서 도수 높은 안경 쓰고 뒹굴거릴 때와 영 딴판입니다.

절세의 미녀 피오나 공주. 하지만 그녀도 해가 지면 흉측한 ‘괴물’로 변신하죠? 옛날 옛적 신데렐라도 12시 ‘땡’ 하면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처럼.

저 역시 10시가 지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마찬가집니다. 시청자들이 보는 제 모습은 없습니다. 남들과 똑같이 편안한 복장에 편안한(어떤 분은 편안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얼굴이 됩니다. 아, 그렇다고 ‘괴물’ 수준은 아니니까, 너무 ‘화장발’로 몰아가진 마세요. 화장 안 한 게 더 어려보인다 하던 걸요? 하하.

매일 얼굴에 화장을 덧입혔다 지우는 것처럼, 마음에도 화장을 했다 지우는 작업을 반복합니다. ‘가식’이라 할 수 있을까요? ‘겁나먼 왕국’의 ‘공주’에게 요구되는 자세가 있듯 방송인에게는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합니다. 붉으락 푸르락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사랑하는 가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금방이라도 몸져누울 것 같을 때, 단 한 번도 티낼 수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카메라를 마주했죠. 특히 어머니처럼 키워주신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날도 방송을 해야 했을 때는 화면이 넘어갈 때마다 가슴으로 울었습니다. 화장이 번질까봐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몇 번이나 외면했고요.

피오나 공주는 ‘저주’가 풀리면 ‘미녀’가 될 줄 알았지만, 본모습은 못생긴 ‘괴물’이었습니다. 운명의 짝도 상상처럼 ‘멋진 왕자님’이 아니라 못생긴 ‘슈렉’이고요. 이 얼마나 통탄할 일! 하지만 둘은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또 그 모습을 사랑해줄 사람이 서로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저도 화면에 나오는 제 모습이 아니라-조금은 실망스러울 지도 모르는-‘자연인 조수빈’을 사랑해 줄 솔메이트를 찾아 ‘겁나 먼’ 길을 가는 중인지도 몰라요. 민낯을 예뻐해 주고,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없는 그런 사람이요.

늘 이상형으로 ‘장동건’ 씨를 꼽곤 했는데, 어쩌면 저의 왕자님은 못생기고 뚱뚱한 ‘슈렉’일지도 모르죠. 그래도 마음만큼은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프린스 차밍’처럼 잘 생겨도 마마보이는 정말 ‘우웩!’이에요.

모험 길에서 당나귀 동키와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친구를 만났듯 여러분을 만났습니다. 당차고 적극적이던 피오나 공주처럼 저도 스포츠동아에 먼저 칼럼을 연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죠. 워낙 ‘겁나 먼’ 길이라서 아직 가슴 따뜻한 왕자님까지는 못 만났어요. 하지만 지면에서만큼은 가면을 벗고 참모습, 속마음을 보여드릴 수 있었습니다.

혹시 저의 민낯에 실망하신 건 아니겠죠? 어디선가는 여전히, 자연인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있겠습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조수빈

꿈많은 KBS 아나운서.

영화 프로 진행 이후 영화를 보고 삶을 돌아보는 게 너무 좋아 끼적이기 시작함. 영화에 중독된 지금, 영화 음악 프로그램이나 영화 관련 일에 참여해보고 싶은 욕심쟁이, 우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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