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90주년]모래알 교포들 “독립” 함성으로 뭉쳤다

  • 입력 2009년 2월 27일 02시 58분


①1919년 4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한인 자유대회가 끝난 뒤 참가자들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②1919년 3월 13일 중국 옌볜 조선족자치주 룽징에서 열린 독립 선언식. 룽징의 3·13만세운동에는 3만여 명이 참여해 독립을 외쳤다. ③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거행된 1920년 3·1절 기념식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④1979년 일본에서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개최한 2·8독립선언 60주년 기념식. 사진 제공 한국근현대사학회
①1919년 4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한인 자유대회가 끝난 뒤 참가자들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②1919년 3월 13일 중국 옌볜 조선족자치주 룽징에서 열린 독립 선언식. 룽징의 3·13만세운동에는 3만여 명이 참여해 독립을 외쳤다. ③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거행된 1920년 3·1절 기념식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④1979년 일본에서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개최한 2·8독립선언 60주년 기념식. 사진 제공 한국근현대사학회
《3·1운동은 전 세계 한인 사회를 통합해 한민족 네트워크의 정체성을 확립한 기폭제였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근현대사학회(회장 한철호 동국대 교수)가 27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여는 3·1운동 90주년 기념학술대회 ‘3·1운동의 세계사적 맥락과 해외 한인 사회’는 3·1운동이 해외 한인 사회에 미친 영향이 한민족 네트워크 탄생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고찰한다.

이 학술대회는 동아일보사와 국가보훈처가 후원한다.

미리 배부된 6명의 논문을 정리했다.》

‘해외 한인사회에 미친 영향’ 오늘 학술대회

한국근현대사학회 주최, 동아일보사 후원

○ 분파갈등 겪던 美 한인단체 반목 씻어

김도형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3·1운동과 재미 한인의 대응’에서 “미주의 한인 사회는 3·1운동의 독립선언을 조선이 독립국가임을 선포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는 독립국의 국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인식으로 확대됐다”고 말했다. 1903년부터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은 대부분 희망을 찾아 조국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런 한인들이 3·1운동 소식을 접한 뒤 ‘미친 듯 만세 부르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3·1운동은 미주 한인의 민족 정체성 형성의 분기점이었다.

3·1운동은 분파 갈등을 겪었던 미주 한인 사회를 통합하는 계기도 됐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이런 반목이 봉합된 것이다. 미주 한인을 대표하는 단체인 대한인국민회는 특히 독립운동 후원을 위한 모금에 나섰고 1919년 12월 15일까지 8만8000여 달러가 모금됐다. 미국 전역에서 독립운동 후원 단체가 탄생했다.

○ 中 조선족, 정체성 찾아

김태국 연변대 인문사회과학학원 교수는 ‘중국 조선족의 문화 성격과 3·1운동’에서 “중국 민족과 한민족이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지닌 조선족이 민족 독립을 위해 하나로 뭉치는 과정에서 민족 정체성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조선인의 중국 이주는 17세기 초에 시작됐다. 조선족은 오랜 이주 역사 속에서 중국 문화를 흡수해 중국 56개 민족 중의 하나라는 정체성도 강했다.

1910년대 중국 동북 지역의 독립군 활동, 1919년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룽징의 3·13만세운동을 통해 중국 이주 한인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신들이 사는 터전을 일본에 빼앗기지 않겠다는 이중의 목표로 뭉쳤다. 한민족과 중국 민족이라는 이중적 정체성이 독립운동으로 통합된 것이다. 김 교수는 “중국 한인들이 3·1운동을 통해 자유, 평등, 정의, 인도라는 근대적 가치를 본격 수용해 근대 민족으로서 자아를 확립했다”고 말했다.

○ 러 국적 한인-비국적자 단결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과 재노령 한인사회의 민족정체성 형성과 변화’에서 “3·1운동 이전까지 러시아 국적 한인과 비국적 한인이 보여준 대립된 정체성이 3·1운동을 통해 통합됐다”고 말했다.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은 조약 체결 이전 러시아로 이전한 한인에게만 러시아 국적과 토지소유권을 줬다. 러시아 국적자들은 사회, 경제적 지위 향상을 추구했지만 항일 운동은 하지 않았고 러시아혁명 세력을 지지한 비국적자들은 사회개혁과 항일운동을 추구했다.

분열된 러시아 한인 사회는 3·1만세운동에 동참하면서 조국의 독립이라는 일치된 목표로 단합했다. ‘우리는 우리 국가와 분리하야 있으나 우리가 한국에 일분자가 된 이상에 우리 고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으로 한민족의 약탈자 군국주의자 일본의 사나운 발톱에 걸리어서 죽어가는 우리 민중의 고통을 동감하는 것이라.’(1923년 3월 7일 러시아 한인들을 대상으로 작성된 문건)

○ 재일 한인, 탄압 속에서도 각종 기념 행사

김광열 광운대 일본학과 교수는 ‘재일 한인의 민족해방운동과 3·1운동’에서 “3·1운동 기념 운동은 1920년 초반의 학생, 1920년대 중반 이후의 노동자로 주체와 방식은 달라졌지만 일본 내 한인의 민족심을 고취시키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1920, 1921년의 3·1운동 기념행사가 유학생 중심으로 열렸던 것과 달리 1920년대 중반부터는 유학생과 함께 사회운동, 노동조합 운동단체들이 3·1운동 기념행사를 주도했다. 1924년에 열린 3·1운동 기념행사에는 유학생 학우회, 조선노동동맹회, 무산청년회, 여자흥학회, 북성회(유학생 중심의 사회주의 단체) 회원이 참가했다. 1930년대 이후 3·1운동 기념행사는 노동자와 좌파 단체에 의해 주도됐는데 김 교수는 당시 재일 한인 대부분이 육체 노동자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3·1운동에 영향을 준 민족자결주의의 한계, 3·1운동 이후 조선 지식인들이 문명 비판과 대안 사조를 모색한 개조론의 확산 과정을 분석한 논문도 나온다.

전상숙 국민대 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파리강화회의와 약소민족의 독립문제’에서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독일의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 식민지 독립 문제를 논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고 말했다.

허수 동덕여대 연구교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 개조론의 확산과 한국 지식인’에서 “3·1운동 이후 지식인들의 개조론은 문화주의, 데모크라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으며 동아일보의 문화주의는 ‘개인이나 사회의 생활내용을 충실히 하고 풍부히 함으로써 부의 증진과 정치의 완성, 도덕의 순수, 종교의 풍성, 과학의 발달, 철학 예술의 심원과 오묘’를 추구했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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