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에두아르 마네(1832∼1883). 19세기 관객들은 그의 새 그림이 나올 때마다 심한 욕설과 비판을 쏟아냈다. 나체의 여성과 정장 차림의 남성을 그린 ‘풀밭 위의 점심식사’처럼 외설스럽다는 것이다. 비평가들은 마네가 데생과 원근법도 모른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미셸 푸코(1926∼1984), 조르주 바타유(1897∼1962) 같은 20세기 철학자들은 마네의 그림에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상명대 명예교수인 저자는 푸코와 바타유 등 철학자들이 해석한 ‘마네론(論)’을 바탕으로 마네 그림을 읽는다. 이 책의 제목은 푸코가 마네 작품 13점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데서 따왔다.
저자는 19세기 관객과 평단이 마네를 비난한 것은 외설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여성의 나체는 비너스 여신 등을 통해 거듭 형상화됐다. 비난의 실제 이유는 전통적 서양 회화 기법을 무시한 마네의 실험성이었다.
마네의 그림은 답답하다. 서양 미술의 전통적 규칙인 원근법을 무시했다. 저 멀리 광활한 경치가 펼쳐지지 않는다. 주인공이 관객의 코앞에 다가와 있고 그 뒤에 벽이나 어두컴컴한 배경이 가로막고 있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여성의 나체를 그린 작품 ‘올랭피아’에서 나체는 신비롭지 않고 볼륨감도 없어서 마치 납작한 인형을 보는 것 같다.
푸코에 따르면 마네의 이런 기법은 얇은 종이나 캔버스의 평면에 그린 회화의 2차원적 물질성을 솔직히 드러내려는 것이다. 원근법은 2차원의 평면에 마치 3차원 세계가 펼쳐지는 듯한 환상을 주는 눈속임이다.
마네는 또 내적 조명이 아니라 외적 조명의 방식을 썼다. 내적 조명은 그림 속 테이블의 촛불처럼 그림 내부에 빛을 발하는 광원을 마련해 음영(陰影) 효과로 사실성을 높이는 전통적 서양 회화 기법이다. 하지만 그림 속의 빛은 가짜다. 사각형의 평면에서 빛이 나올 수 없다. 마네는 화가나 관객의 시선에서 비치는 빛을 그림에 표현하는 것(외적 조명)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마네는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의 이상적인 자리가 화폭 정중앙이라는 관습도 깨뜨리려 했다. 바의 카운터 뒤에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종업원을 그린 작품 ‘폴리베르제르 바’는 여종업원 뒤로 손님이 가득 찬 넓은 홀이 보이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이다. 이상한 점은 그림의 오른쪽 거울에 손님과 대화하는 주인공의 뒷모습이 비스듬히 비치고 있다는 것. 거울에 비친 주인공을 제대로 보려면 화폭의 정중앙이 아니라 그림의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그림을 감상하는 고정된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바타유는 마네 그림의 주제에 주목했다. 오랫동안 관객은 신화, 역사적 일화 같은 특정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그림에 익숙해 있었다. 그림이 서사성에 종속된 것이다. 마네의 그림은 그렇지 않다. 바타유는 마네의 그림이 서사에서 해방된, 있는 그대로의 그림을 보여줬다고 말한다. 마네는 무엇인가를 말하는 회화가 아니라 ‘회화의 침묵’을 원했다.
푸코의 말처럼 기존 서양 미술의 모든 규칙을 뒤엎은 마네는 ‘현대 미술’의 시작이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