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은 비극이었고, 현재로선 분명히 그렇게 끝날 것처럼 보인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화자는 캔버스다. 국내 처음 소개되는 네덜란드 출신 작가의 이 소설은 펠릭스 빈센트라는 초상화가가 구입한 캔버스가 불태워질 처지에 놓이게 된 신세를 한탄하며 지금까지의 일들을 털어놓는 구성을 지니고 있다.
사건은 빈센트가 거부인 발레리 스페흐트에게 죽은 아들 싱어의 초상화를 부탁받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빈센트는 살아 있는 사람만 그린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저택을 사기 위해 의뢰를 받아들인다. 의뢰인의 조건은 하나다. 초상화를 통해 아들의 생명을 되살리고자 하니, 누구에게도 그것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것.
초상화의 대상자가 이미 죽은 아이였으므로 그는 싱어에 대한 정보는 의뢰자와의 대담과 그가 전해 준 비디오, 폴라로이드 사진 등을 통해 입수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의아한 점들이 하나둘씩 드러난다. 싱어는 검은 피부에 넓적한 코를 가진 아프리카인이었고, 촬영된 비디오 안의 소년은 나체로 등장하고 있었다. 아버지 스페흐트는 아들에 대한 상세한 사항을 모르는 데다 아들이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게 됐는지에 대한 대답을 주지 않는다.
그림을 누구에게도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조건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 그런 가운데 초상화가 완성되고, 화가의 옛 여자친구이자 잡지 기자인 민커가 그 그림을 보게 되면서 자신이 취재해왔던 의뢰자인 스페흐트의 비밀을 빈센트에게 알려준다.
스페흐트가 사실은 소아대상 성도착증 환자이며, 싱어는 팔려온 아이였다는 것. 그 사실을 접한 빈센트는 스스로 만족했던 싱어의 초상화와 스페흐트가 전한 자료를 불태운다.
하지만 뒤늦게 병든 스페흐트가 휠체어에 탄 채 나타나면서 그에 관한 소문의 진위가 밝혀진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산통에 가까운 예술가의 창조 작업,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라는 주제의식이 드러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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