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건축의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김장훈 아주대 교수(건축공학)는 2일 최근 재미과학자에게서 입수한 1986년의 첨성대 실측 도면과 현장 조사를 바탕으로 “첨성대는 화강암을 한 단 한 단 올릴 때마다 첨성대 내외부에 그만큼 높이로 완만한 경사의 ‘흙 비계’(높은 곳에서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임시 설치한 가설물)를 쌓아 무거운 화강암을 지표면에서 작업 공간으로 이동시켰다”며 “흙 비계 덕분에 세밀한 곡선을 유지한 안정적인 건축이 가능했다”고 밝혔다.》
■ 아주대 김장훈 교수 실측도면 바탕 ‘흙비계 공법’ 제시
김 교수는 이 연구 결과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계간학술지 ‘문화재’ 42권(6월 발간)을 통해 ‘첨성대 건립에 대한 시공방법론’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647년 건립된 첨성대는 50∼870kg에 이르는 무거운 화강석을 한 단씩 둥글게 배치하면서 위로 갈수록 좁아지지만, 이를 어떻게 쌓았는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삼국유사는 “돌을 다듬어 쌓았다”고만 전했고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도 별다른 단서를 주지 못했다.
김 교수는 첨성대 건축 때 신라인들이 흙 비계를 사용한 근거로 첨성대 위쪽과 아래쪽의 형태가 약간씩 차이가 난다는 점을 제시했다.
흙을 쌓아 작업 공간을 확보하면 장인들이 쌓아올린 아랫부분이 흙에 가려 현재 쌓는 단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아래위 단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 교수가 도면을 분석한 결과 △첨성대 아래 기단 면이 바라보는 방향과 그 위 중간 창이 바라보는 방향이 달랐으며 △첨성대 꼭대기와 가장 아래 제1단 원의 중심 위치가 20cm 차이가 났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 △각 단의 몸통은 완전한 원이 아니라 약간씩 일그러져 있었고 아래위로 이웃하는 단도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김 교수는 특히 지금도 첨성대의 중간 창 바로 아래 제12단까지 내부에 채워져 있는 흙이 ‘흙 비계 가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흙 비계를 이용한 신라인의 첨성대 건축 과정을 재구성하면 아래와 같다. 화강암으로 첨성대 몸통의 단을 올릴 때마다 높이만큼 첨성대 내부에 흙을 채웠다. 외부는 다음 단에 쌓을 돌을 지표면 위에서 끌어올려 작업할 수 있도록 완만한 경사를 유지했다. 이 덕분에 밑지름 5.17m 윗지름 2.5m의 원형으로 화강암을 둥글게 쌓는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완성된 직후 첨성대는 주변에 쌓아올린 흙에 묻혀 외관이 드러나지 않았다. 높이 9m 경사각 20도로 쌓은 흙 비계는 지름이 52m에 이르러 마치 고분을 연상시켰을 듯하다.
첨성대가 완공된 뒤 장인들은 위부터 내외부의 흙을 제거하면서 외부 표면을 매끈한 원형으로 다듬었다.
덕분에 울퉁불퉁한 내부와 달리 외부의 표면은 균일하게 정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창 아래 내부의 흙은 더 파낼 수 없었다. 첨성대 안에 지금까지 흙이 남아 있는 이유다. 1360여 년 전 쌓은 ‘흙 비계’의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천문관측 공간 첨성대, “제단” “해시계” 등 이견도 많아
국보 31호 첨성대가 천문 관측 공간이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첨성대 정상의 5.3m²(1.6평) 공간이 비좁아 관측대로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다. 첨성(瞻星)을 “별을 우러러보다”로 해석해 제천 의식용 제단이었다는 말부터 첨성대가 해시계라는 주장, 현세와 신의 세계를 연결하는 우물이었다는 주장 등이 엇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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