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청춘, 18 대 1’은 영화 미학을 연극에 접목했다. 그래서 아름답다.
1944년 일본의 수도에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도쿄시청장(시장·조성호)을 폭사시키려는 조선 젊은이들이 주인공이다. 이들이 조국의 독립에 목숨을 바치는 사연을 회상하는 대목은 슬라이드 필름을 환등기로 비춰 보는 듯한, 아슴푸레한 효과를 자아낸다. 아예 배우들이 단체 기념사진 속 포즈로 서 있는 장면도 자주 등장한다. 일본인과 대화할 때 배우들은 일본어로 연기를 펼치는데 무대 오른쪽 벽에 한글 자막이 나온다.
이미지에 소리를 입히는 것도 영화적이다. 극 초반에 일본 형사에게 살해되는 김건우(민대식)는 회상 장면마다 따르릉 따르릉 소리를 내는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다. 소리와 이미지의 결합이 낭만적 효과를 강화한다. 어쿠스틱 사운드 그룹 ‘푸투마요’가 창작·연주하는 배경음악은 영화음악 뺨치게 서정적이다.
‘죽도록 달린다’와 ‘왕세자 실종사건’을 통해 ‘이미지극’이란 형식실험을 시도해 온 한아름 작가와 서재형 연출가의 작품답게 탐미적이다. 이들은 독립투사의 이야기가 아닌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청춘의 무모한 아름다움을 그려내고자 했다고 말한다. 작품 제목도 18 대 1의 싸움에도 물러서지 않는 청춘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기 위해 쓴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탐미주의가 빠지기 쉬운 덫에 걸렸다. 죽음을 미화하려는 유혹이다. 조선 젊은이들은 댄스광인 도쿄시청장을 유인하려 볼룸댄스를 배우며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결국 도쿄시청장 암살에 실패하자 춤을 추며 집단자결을 택한다. 그들에겐 도쿄시청장 암살보다 ‘아름다운 죽음’ 자체가 목표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신부조차 배 속 아기에게 “너는 용감할 거야”라면서 죽음을 감행하는 도착증을 보인다. 일본의 탐미주의가 군국주의를 만나 ‘죽음의 미학’에 빠졌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미지에 치중한 끝에 서사가 비약하거나 헝클어지는 대목도 보인다. 댄스홀에 숨어 있던 조선 젊은이들은 그들을 체포하려는 일본 형사는 때려잡으면서도, 정작 도쿄시청장이 홀로 댄스홀을 찾아와 조선인 댄서 윤하민(김은실)을 겁탈할 때는 숨죽이고 있다. 주인공들이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절박함이 더욱 아쉬운 이유다. 15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에서. 2만5000원. 02-708-5001∼3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