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0시 5분/황동규 지음/140쪽·9000원·현대문학
시인은 황혼녘에서 점차 어둠이 깔리는 길,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어느 계절 사이를 걷고 있는 듯하다. 하나둘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헛헛한 목소리로 자문하는 목소리에 시간의 무게와 뜨겁고 치열했던 한때를 지나온 이의 관록이 묻어난다. ‘가을이 오고 있겠지/그래 그 가을의 문턱에서 지금 뭘 해?’(헛헛한 웃음)
지난해 등단 50주년을 맞았던 황동규 시인(71·사진)이 열네 번째 신작 시집 ‘겨울밤 0시 5분’을 펴냈다. 고희를 넘긴 시인의 삶에 대한 통찰과 시적 상상력이 촘촘히 드러나는 60여 편의 시가 수록됐다. 마을 산책길이든, 산행이든, 복잡한 거리든 시인은 어디든지 걸어가며 그 일상의 장면들을 잡아낸다. 스쳐 지나가기 쉬운 사소하고 평범한 것도 하나 놓치는 법 없다. 늦가을 저녁 내리는 빗소리나 학교 교정 틈에 있는 풀 한 포기에까지 시인의 섬세한 촉수가 닿아 의미를 빚어낸다.
‘쥐똥나무 울타리 밑에서 주워든/얼어 죽은 참새의 별난 가벼움/빈 뜰에서 싸락눈 맞고 있던/철없이 핀 장미의 전신 추위/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여자의 살짝 들린 둔부/를 내리누르던 바위 같은 얼굴의 어둠…물건만 잔뜩 문밖에 내 논 쓸쓸한 가게들을 지나/힘없이 싸우고 있는 두 여자를 지나…쥐똥나무 울타리까지 가겠습니다.’(겨울산책)
이 가운데 가을 겨울의 풍경이 자아내는 비감과 노년의 감회는 시간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추억을 하나씩 되새김질’하는 시인의 섬세한 관찰은 삶의 무상함과 맞물리고 ‘몸속 어딘가 지워지지 않는 결들로 남아 아린’ 삶은 때로 ‘쓰라리고 아픈 것’이 돼 돌아오기도 한다.
시린 겨울밤 정거장에서 막차를 기다리고 선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낸 표제작에서는 누군가가 왔다 떠나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사라져 버리는 삶이 압축돼 있다. ‘길을 건너려다 그냥 걸어’ 아무 이유 없이 이곳에 이끌려 온 시인은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새로운 실존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그대들은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는 세상?/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이면서 빛 내뿜는/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 밖처럼 어른대다 멎었다/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겨울밤 0시 5분)
일상의 생생한 감각에서 일깨워진 시를 따라가다 보면 세상을 향한 시인의 원숙한 시선과 깨달음의 노정에까지 이른다. 삶의 맛은 무병(無病)으로부터가 아니라 신열이 가신 자리에 피는 ‘환한 살아있음’임을(‘삶의 맛’), 젊음 뒤의 삶은 늙음이 아니라 새로운 여정임을.
‘그래, 젊음 뒤로 늙음이 오지 않고/밝은 낙엽들이 왔다/…어떤 나무의 분신이면 어떤가, 착지, 착지, 땅이 재촉하는데?/밝음 하나를 공중에서 낚아챈다. 바람결에 놓친다/착지, 착지, 땅이 재촉하는데/밝은 몸 한 장/땅 어느 구석에 슬며시 내려앉지 않고/뒤집혔다 바로잡혔다 긴가민가하게 날고 있구나.’(밝은 낙엽)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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