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가 만난 사람] 57세, 집념의 학사모 송공석

  • 입력 2009년 3월 7일 08시 13분


“공부가 재미있었습니다.”

지난 달 25일 고려대 졸업식장에서는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신사가 학사모를 쓰고 20대 젊은이들과 함께 활짝 웃고 있었다.

동생뻘 되는 교수들이 그의 졸업을 축하했다. 이기수 총장과 장하성 경영대학장도 늦깎이 졸업생을 찾아와 직접 축하의 말을 건네고 기념촬영을 했다.

3살짜리 손자가 건네 준 꽃다발을 든 노신사는 더 없이 행복해 보였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토록 자신에게 모질었던 인생도, 세상도 모두 자신의 발아래에 놓여 있었다.

만 57세의 나이에 대학 졸업장을 받은, 고려대 경영학과 사상 최고령 졸업자가 된 이 노신사는 송공석 와토스코리아 대표이사다. 수시 특기자 전형에서 무려 92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2005년 학번이 됐고, 이는 당시에도 꽤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가 4년 만에 130학점을 모두 이수하고 졸업의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젊은 대학생들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는, 피땀 젖은 ‘4년 무결석’의 결실이었다. 그것은 또한 희망이 사그라지는 이 시대에 피어난 한 송이 희망의 꽃봉오리였다.

송공석 대표는 자수성가의 교과서와 같은 삶을 살았다. 전남 고흥 출신인 그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말도 못 하게 가난했죠. 아버님은 머슴살이를 하셨고, 남의 집 일해주고 받아 온 쌀로 가족이 먹고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도시락이란 걸 싸 본 기억이 없어요. 학교를 가는 것만 해도 언감생심이죠. 위로 넷째까지는 모두 초등학교밖에 못 다녔습니다.”

송 대표는 16세 되던 해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처럼 머슴을 살라고 하는데 그건 도저히 못 할 일이었다. “형님이 서울에 먼저 올라가 계셨어요. 무작정 찾아갔죠. 무슨 식당에서 일하고 있더군요. 형님이 중국집을 소개해줬습니다. 군자동에 있던 중국집이었는데, 가니까 주방에서 식기를 닦으라고 하더라고요. 딱 하루 했는데, 냄새가 너무 나서 도저히 못 하겠습디다.”

그래서 다시 고향 앞으로. 집 농사를 거들면서 방바닥만 긁는 나날이 이어지던 중 서울에 가 있던 친구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무슨 화장실 부속품 만드는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혹시나 싶어 ‘나도 좀 붙여줄 수 없겠냐’ 했더니 얼마 뒤 ‘와도 된다’는 답신이 왔다.

이렇게 해서 서울생활이 시작됐다. 사무실에서는 주로 배달을 했고, 공장에서도 일했다. 그런데 그만 회사가 부도가 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스물이 되던 해였다.

“장사를 시작했어요. 길거리 지하도에서 애들 장남감도 팔고, 리어카 끌고 다니면서 고물장사도 하고, 화장품 외판원에다 석유곤로 판매까지. 이것저것 많이 했어요. 그런데 잘 안 됩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옛 거래처를 찾아갔다. 의외로 사람들이 반색을 하며 맞아 주었다. ‘이런 저런 물건이 필요하니 네가 좀 구해달라’는 얘기를 들었다.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공급이 끊긴 탓이었다.

‘내가 해 보자’하고 마음을 먹었다. 1973년 7월의 일이다. 올해로 창립 36주년을 맞은 코스닥 상장 기업 와토스코리아의 탄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요즘으로 치면 ‘1인 기업’이라고 해야 하나. 공장이랄 것도 없고, 그냥 제가 사는 2평 자취방에서 시작했습니다. 회사가 망하기 전에 물건을 들여놓은 곳을 아니까, 그 재고를 사다가 필요한 곳에 넘겨주고 중간이득을 먹는 거죠. 그런데 그것도 얼마 지나니 시중에 재고가 바닥이 난 거라. 그래서 아예 직접 만들기로 나선 겁니다.”

물건을 만들려니 자금이 필요했다. 장사하면서 모은 돈은 바닥이 난 상태. 주머니에는 동전 한 푼 없었다.

“시골에 내려갔죠. 혹시나 싶었지만 부모님이 무슨 돈이 있으시겠습니까. 포기하고 그냥 올라오려는데 마을 주조장 하시는 어른이 ‘왜 왔냐’하시더군요. 사정을 설명하니 그분이 덥석 5만원을 쥐어 주셨습니다. 당시 쌀 8가마 정도 살 수 있는 돈이었죠. 그걸 가지고 올라와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어른이 와토스코리아의 첫 투자자였던 셈입니다.”

- 공부 얘기로 돌아가 보지요. 사업가로 성공하셨는데 왜 굳이 만학을 결심하게 되셨는지요?

“2003년이 창사 30주년이었어요. 기념식을 위해 초청장을 만들었습니다. 리스트를 정리하다 보니까 한 1000여 명 되겠더라고요. 대부분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죠. 그걸 보고 있자니 제가 사업을 해서 돈은 좀 벌었는지 모르지만 어쩐지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회사가 틀을 잡아가다보니 과거와 달리 대졸자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내 자신이 너무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고요. 그래서 마음을 먹었습니다. 뭔가 해보자. 나의 빈 가슴을 채우자.”

이 해 6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검정고시를 봐야겠는데 문제는 ‘국영수’였다. 이건 도저히 독학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을 집중 학습의 날로 정했다. 오후 3시부터 밤 10시까지 네 명의 개인 선생이 교대로 와 수업을 진행했다. 8월 5일 고입검정을 통과했고, 이듬 해 4월 5일에는 대입검정고시의 벽을 넘었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중등과 고등과정을 패스하고 나니 대학이 눈에 들어왔다. 수능시험은 무리겠다 싶었는데 마침 고려대에 특기자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발명특기자, 벤처기업 종사 또는 경영하는 자, 사회 공헌활동 등 자격조건에 부합했다.

- 대학생활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으셨을 텐데요?

“공부는 재미있었습니다.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희열이 있잖아요. 우리같은 사람들은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못 했으니 더욱 그렇죠. 그래도 쉽지는 않습디다. 특히 경영수학. 용어 자체가 이해가 안 되니까. 학생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죠. 교수님들이 후하게 봐주셔서 다행히 4년 내내 학사경고 맞은 일은 없습니다. 남들이 ‘4년 무결석’이 대단하다고들 하는데, 사실 저로서는 유일하게 포인트를 딸 수 있는 게 출석이었습니다. 아무리 비정한 교수라도 출석 백프로는 F를 안 주거든. D는 먹고 가니까 … 하하!”

와토스코리아는 양변기, 세면기, 욕실 등의 절수부품을 생산하는 회사이다. 그는 대학에서 배운 이론을 경영에 접목시켜 매출을 급성장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배운 것으로만 그치면 의미가 없다.

향후 2, 3년간은 배운 이론을 바탕으로 경영에만 치중할 생각이다.

송 대표는 불우이웃을 돕는 일에도 관심이 많다. 스스로 자수성가하며 고생을 한 까닭이다. 하루는 30여 년 전 자신이 차비 마련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훔쳤던 대폿집 자전거 생각이 났다. 2500원을 받고 판 자전거였다. 그날로 2500만원을 만들어서 신문사에 가져갔다. 그 돈은 심장병 환자 수술비로 쓰였다.

이렇게 시작한 수술비 지원으로 벌써 7명이 건강한 심장을 되찾았다.

IMF 때에는 자사 특정제품 하나 당 50원씩 적립해 수 천 만원의 기부금을 만들었다. 고향에는 최신 시설의 노인당도 건립했다.

인터뷰 끝 무렵, 송 대표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따끔한 조언을 남겼다.

4년 간 자식 같은 젊은이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그들의 생각과 사고에 대해 깊이 고민한 결과이다.

“일자리가 없다고들 하지만 다 거짓말입니다. 실업자(失業者)가 아니라 ‘일을 싫어하는 사람’인 ‘싫업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거죠. GDP 2만달러 시대에 3만, 4만달러 수준을 요구하니 힘든 겁니다. 좋은 일자리의 개념이 뭡니까. 실컷 부려먹다가 30, 40대에 자르는 데가 좋은 일자리입니까? 첫발을 내딛고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할 수 있으면, 그래서 남들이 알아주는 경지에 오르고, 아쉬운 소리 안 하고도 기반을 닦을 수 있으면 그게 좋은 일자리 아닙니까? 중소기업으로 오세요. 정말 몸 바쳐서 하고 싶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중소기업은 참으로 애타게 인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사진|김종원 기자 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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