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광대 부모의 길, 아들도 그 길에 서다

  • 입력 2009년 3월 12일 02시 59분


심봉사와 뺑덕어멈 연기를 선보이는 ‘찰개비’ 광대 부부. 쌀쌀한 날씨 탓에 아들은 노부모가 감기라도 들세라 안절부절못했다. 김미옥 기자
심봉사와 뺑덕어멈 연기를 선보이는 ‘찰개비’ 광대 부부. 쌀쌀한 날씨 탓에 아들은 노부모가 감기라도 들세라 안절부절못했다. 김미옥 기자
20~31일 유랑광대전 펼치는 ‘찰개비’ 가족

《팔십 평생을 쏟아 부어도 ‘전통 예술인’이라고 자존심 세울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적어도 모태에 있을 때부터 ‘귀동냥’해야 한다는 얘기. 전통예술계에서는 대를 잇는 예인을 ‘개비’라고 한다. 그 전통이 좀 오래됐다 싶으면 ‘찰개비’라고 부른다. ‘비(非)개비’라 하면 욕이다. ‘찰개비’ 광대부부 강준섭(76) 김애선 씨(66)가 있다. 이들은 ‘판’에서 살고 삶 자체를 판에서 배웠다. ‘판’이 곧 삶이다. 광대 동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뜨거나 자취를 감췄다. 현역 ‘토종 광대’는 한 손에 꼽을 만큼만 남아 있다.》

광대부부가 모처럼 서울에서 판을 벌인다. 대를 잇고 있는 아들 민수 씨(30)도 북채를 든다. 20∼31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사장 김홍렬)이 운영하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국문화의 집 코우스(02-567-8026)에서 ‘유랑광대전’이 펼쳐진다. ‘찰개비’ 광대 가족을 6일 코우스에서 만났다.

● 아버지 강준섭

“아들이 전수를 받겠다니까 힘들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 어머니 김애선

“꽹과리만 가지고 놀더니… 지 살길 알아서 찾아가네요”

● 아들 김민수

“어릴땐 부모 부끄러웠지만 이젠 모든것 열심히 배울것”

○ 광대의 삶, 광대의 길

춤, 소리, 악기. 우리 전통연희의 여러 기량을 지닌 예인, 광대.

“시골 구석구석까지 찾아가 공연함시롱 살았소. 구경꾼들이 웃다가 탈장할 지경에 이르러야 광대는 사요. 그게 광대가 할 일이고 그래야 벌어먹소.”(강)

전남 진도의 세습무가에서 태어난 강 씨는 열세 살 때 ‘어정판(굿판) 식은 밥’을 더 먹기 싫어 집을 나왔다. 일제강점기 공연을 미끼 삼아 물건을 파는 일본의 보부상 조직 ‘데키야’를 따라다녔다. 거기서 명창 김준섭(1913∼1968)을 만나 심봉사 연기를 배웠다.

이후 ‘딸딸이’(수레바퀴 소리에서 따온 말)라 불리는 유랑극단을 따라다니며 판소리 ‘심청전’ ‘흥부전’부터 사극 ‘어사 박문수’ ‘단종애사’, 현대극 ‘안개 낀 목포 강’ ‘어머니 울지 마세요’까지 닥치는 대로 소리하고 연기했다. 유랑극단 시절에 경남 삼천포 출신인 광대의 딸 김 씨를 만나 결혼했다.

5일장이 서는 소읍에서 유랑극단의 활동은 요즘 ‘TV 홈쇼핑’과 비슷했다. 재담과 소리로 객석을 뒤집어 놓은 뒤 주방세제, 수세미, 고무장갑, 화장지 같은 각종 생필품에 ‘염소 똥’ 약까지 팔았다.

“단원들이 뒷산에서 염소 똥 안 줏었능교. 밀가루 발라가 약이라꼬….(웃음) 인자 그라마 큰일 나지예.”(김)

전국을 떠돌던 부부는 1979년 강 씨의 고향 진도로 돌아갔다. 망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고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상여놀이 ‘진도 다시래기’ 복원에 참여했고 1985년 인간문화재(다시래기 예능보유자)가 됐다.

하지만 강 씨의 주특기는 다시래기보다는 심청전의 심봉사 역할이다. 맹인의 어수룩한 특성을 과장해 표현하는 익살스러운 연기는 그만의 것이다. 의외로 말수가 많지 않던 강 씨가 사진 촬영을 위해 무대의상으로 갈아입었다. 눈빛이 살아나고 말이 많아졌다.

“내 심봉사 연기는 아무나 못하요. 나는 다른 사람처럼은 안 하니께.”

김 씨는 “(돈이) 없어서 그렇지 자존심 세고 책임감 있는 양반”이라고 거들었다.

광대부부에게 ‘분홍색 보따리’는 필수품이다. 그 속에는 찌그러진 갓 하나와 나무 지팡이, 담뱃대가 들어있다. 어디서든 판을 벌일 수 있는 소품이다. 그렇게 먹고살아왔다.

“이것만 있으믄 저승길 간다 해도 걱정 ㅱ당게.”(강)

○ 아버지의 길을 따라

민수 씨는 장난감보다 꽹과리를 좋아하는 꼬마였다. 광대부부는 늦둥이 아들이 ‘다른 일’을 하길 바랐다. 그러나 아들은 뭐든 두드리며 놀았고, 급기야 초등학교 때는 꽹과리를 배우겠다고 했다.

“팔잔데 우짤끼고, 니 하는 대로 해봐라 했지요. 안 갈Q는데도 듣고 본 기 있으이 지 살길 찾아 가데요.”(김)

아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사물놀이를 전공한 뒤 서울 정동극장 사물놀이 단원으로 9년간 일하다 올해 2월 그만뒀다. 기력이 쇠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낙향해 전통연희를 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나 죽으면 나 같은 연기를 할 사람이 전국 어디에도 없소. 아들이 전수 받겠다니까 (마음이) 힘들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강)

민수 씨의 말이다.

“어렸을 때는 장터에서 부모님이 이상하게 분장하고 사람들 웃기고, 광대로 공연하는 게 부끄럽더라고요. 그런데 철들고 보니 우리 것을 지켜가는,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버지의 모든 것을 열심히 배워보려고 합니다.”

어머니가 추임새를 넣었다. “우리 아들, 똑 소리 나부러.”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동아일보 김미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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