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선인의 지혜, 숨쉬는 과학… ‘담장 속의 과학’

  • 입력 2009년 3월 14일 02시 58분


◇ 담장 속의 과학/이재열 지음/240쪽·1만5000원·사이언스북스

옛사람들은 나무 한 그루를 심어도 농익은 삶의 지혜를 담았다. 집 안팎에 심은 나무는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 종류가 달랐다.

약한 햇빛을 좋아하고 나무줄기가 엉성한 편이어서 아침 햇빛을 가리지 않는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는 동쪽에 심었고 햇빛을 좋아하는 매화나무와 대추나무는 남쪽에 심었다. 서쪽에는 넓은 이파리의 치자나무나 느릅나무를 심어 석양의 햇빛을 가렸고 북쪽에는 서늘한 기운을 좋아하는 사과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를 심었다. 나무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는 우리나라 기후에서 바람을 막아주는 기능도 했다. 나무를 심어 집터의 부족한 자연조건을 보완한 것이다.

이 책은 자연의 조화를 의식주에 활용했던 옛사람들의 지혜를 에세이처럼 소개했다. 저자는 과학자(경북대 생명과학부 교수)이지만 전통문화에 숨은 과학의 원리를 설명할 때도 굳이 어려운 과학이론으로 힘주지 않았다. 문체는 쉽고 친근하다.

전통 집은 막힌 구조가 아니라 틈이 있어 공기가 드나들 여유가 있었다. 이런 통풍성은 현대 건축가들에게도 관심 대상이다.

“어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통 가옥에서 여름날 한낮에 재어본 뒤란(집 뒤 울타리의 안)의 기온은 마당보다 1, 2도가량 낮다고 한다.” 마당의 더운 공기가 위로 올라가고 나무 그늘에서 식혀진 뒤란의 공기가 마당으로 밀려들어와 대청마루에 바람이 인다는 설명. 대청마루는 대기의 순환 현상을 이용해 냉방과 통풍을 하는 건축 구조다.

처마는 그늘을 통해 담장 안팎의 온도차를 만들어 공기의 흐름, 즉 시원한 바람을 일으킨다. 흙벽은 성글게 썬 볏짚과 황토를 섞었기 때문에 미세한 틈이 많다. 숨구멍 있는 살갗처럼 숨을 쉬어 문이나 창을 열지 않아도 환기가 되는 것이다. 문의 창호지는 방 안 열은 밖으로 쉽게 내보내지 않고 눈부신 햇빛을 약화시켜 커튼이 필요 없다.

아래층에 낙엽을 깔아 분뇨가 쌓이는 대로 썩고 적당한 양이 모이면 밭으로 끌어내 거름으로 썼던 뒷간은 자연 순환의 원리를 따랐다. 제주도에선 화장실을 높은 누각처럼 지어 돼지가 분뇨를 처리했다. 저자는 “요즘도 환경친화적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모인 마을에서는 화장실과 부엌에서 나오는 분뇨와 음식물 찌꺼기를 발효탱크에서 발효시켜 텃밭에 퇴비로 준다”고 말한다.

전통 먹을거리 중에는 미생물의 힘을 이용한 발효음식이 많다. 장을 담그는 것이 발효의 대표적 방법인데, 여기도 생활의 지혜가 숨어 있다.

메주는 고초균(枯草菌) 등 여러 미생물이 가수분해(무기 염류가 물과 작용해 산과 알칼리로 분해되는 반응) 효소를 분비해 콩의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분해시켜 만들어진다. 이런 분해 과정을 통해 된장에 아미노산이 많이 포함되고 소화 흡수가 빨라진다. 그런데 고초균은 짚에 많이 붙어 있다. 메주를 짚으로 묶어 둔 것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제주도를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입은 일옷(일할 때 입는 옷)인 갈옷은 쓰임새가 외국의 청바지와 비슷하지만 청바지보다 기능성이 뛰어나다.

갈옷은 설익어 떫은 풋감(땡감)의 즙을 무명에 물들인 것인데, 땡감 즙의 타닌 성분 덕분에 천이 염색 전보다 10배 질겨진다. 청바지는 피부를 꽉 조이고 비를 맞으면 몇 배나 무거워지지만 갈옷은 비를 맞아도 빗방울이 흘러내리고 방부 방습 방온이 뛰어나다.

저자는 “옛것은 가치 없고 새로운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옛것을 하찮게 여기고 거들떠보지 않는 경향, 전통을 고루하게 생각하고 의식주의 여러 조건이 경제논리에 따라 단순화, 획일화, 대형화돼 우리 생활의 멋과 여유가 줄어드는 현실이 안타까워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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