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50>

  • 입력 2009년 3월 16일 13시 15분


"여전하시군요."

민선이 흩어진 책들을 주워 석범에게 건넸다.

"뭐가 여전하다는 거죠?"

석범이 그 책들을 받아서 책상 위에 올리며 물었다. 긴급 구조 로봇들이 부엉이 빌딩 현장에서 철수한 뒤, 경상자 명단에서 노민선 이름 석 자를 확인한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허벅지와 팔꿈치 타박상이 부상의 전부였다. 도그맘 사건이 마무리 되면 먼저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아침에 민선이 난데없이 나타난 것이다.

"항상 덜렁덜렁 대잖아요. 몸은 여기 있으면서도 마음은 딴 델 헤매고…… 아닌가요?"

"다시 정밀 진단을 받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정말 귀찮아. 만나는 사람마다 절 다시 병원으로 집어넣지 못해 안달이군요. 관심 끄세요."

"대체 어떻게 떨어진 겁니까? 서사라 트레이너는……."

"아, 정말! 비밀이에요."

민선이 단칼에 잘랐다. 짧은 침묵이 흘렀고 석범과 앨리스는 그 단정한 대답에 반문을 못했다. 민선이 이야기를 이었다.

"부엉이 빌딩 옥탑방에서 떨어지고도 멀쩡한 이유를 파헤치려고 특별시립 뇌 박물관 연구원 노민선을 부르진 않았겠지요?"

33.2퍼센트나 33.4퍼센트가 아닌 33.3퍼센트만을 고집하는 여자. 카페 UFO에서 보인 민선의 까칠한 성격이 떠올라서 석범은 미간을 찡그렸다. 타인의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참 까다로운 여자. 그런 여자에게 잔소리 듣지 않으려면 공식적으로 대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석범은 민선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도청이 불가능한 '클린 0' 표시가 출입문 손잡이 위에서 반짝였다. 누군가가 몸에 도청 장치를 하고 이 손잡이를 쥔다면 숫자 '0'이 '100'이 되는 것과 동시에 손잡이에 강력한 전기가 흘러 상대를 기절시킬 것이다.

석범과 민선이 마주 보고 앉았다. 앨리스가 따라 들어오려고 했지만 석범이 눈으로 막았다.

"신경생리학 분야에서 세계 톱 5 안에 드는 실력을 지니셨더군요. 게다가 '비교신경과학' 분야까지 하시고."

석범은 또박또박 이야기를 시작했다. 뇌 박물관장 박운호 박사와 연락을 취하다가 겸임 연구원으로 있는 민선의 연구 업적도 잠시 살폈던 것이다.

"피차 바쁠 테니 원하는 걸 말씀하시죠. 정확히 55분 23초 후부터 회의가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 그 회의엔 참석하실 수 없을 듯합니다."

"뭐라고요? 당신이 뭔데 간섭이에요?"

"간섭이 아니라…… 협조를 구하는 겁니다."

"흥! 협조란 100퍼센트 자발적이어야 함을 모르진 않겠죠? "

민선은 허리를 세우며 엉덩이를 뗐다. 그녀의 깐깐한 성격에 비춰본다면 법적 책임을 묻겠다며 따지고 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개와 늑대의 신경세포에 대한 전기생리학적 비교>(2044)와 <단기기억을 수행하는 동안 개와 인간의 전전두엽의 기능적/해부학적 비교 연구>(2047)란 논문을 읽었습니다. 흥미롭더군요."

석범이 그녀의 논문 둘을 언급하자, 민선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계속해보세요."

"먼저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길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 하십시오. 여기 '서약서'에 손바닥을 올리면 됩니다."

"점점 더 하시네요."

침묵이 흘렀다. 석범은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기다렸다. 설득한다고 통할 성격이 아니다.

탁.

서약서 위에 손을 얹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석범은 눈을 떴다.

"자, 어서 그 무시무시한 비밀을 털어놔 봐요."

석범이 일어나서 회의실을 반 바퀴 돌았다. 그리고 민선의 등 뒤에 서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검시 3팀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뇌수사팀입니다."

"대뇌수사팀? 그게 뭐죠?"

"대뇌수사팀의 임무는 살해당한 피해자들의 마지막 단기 기억을 영상으로 재생시켜 범인을 체포하는 겁니다."

"자, 잠깐! 그러니까 뭔가요? 단기 기억을 완벽하게 재생하는 기술이 있단 건가요? 단기 기억이 전전두엽에서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걸 영상으로 옮기는데 성공한 연구 논문은 읽은 적도 들은 적도 없어요."

민선이 흥분할수록 석범의 목소리는 더 낮고 차가웠다.

"곧 스티머스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헌데 A아파트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경우, 범인이 피해자의 뇌를 가져가버렸습니다."

"뇌가 없으면 단기 기억 재생 자체가 불가능하겠네요. 제게 자문 구할 일이 대체 뭔가요?"

"주인과 함께 살해된 퍼그 때문입니다."

"퍼-그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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