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만화처럼 살았어요”
《1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청담동 ‘이동원 새얼굴’ 피부과.
취재차 들어간 진료실 책상에 스케치북 하나와 사인펜 3개, 36색 색연필 세트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피부과 전문의이자 국내 대표 코스메슈디컬(화장품과 약의 합성어로 약과 유사한 효과를 내는 화장품을 의미) 업체인 ㈜CNP차앤박화장품 이동원 대표(45)의 책상이다.
스케치북에는 검은색 사인펜으로 그린 밑그림에 빨강 노랑 파랑 등 알록달록한 색이 입혀진 만화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이 대표는 쑥스러운 듯 스케치북을 덮고 어질러진 사인펜과
색연필을 정리했다.
“책상이 지저분하죠? 환자 진료 사이사이 짬이 날 때마다
낙서하듯 만화를 그리는 게 취미거든요. ”(웃음)》
● 대학신문에 4단만화 ‘까돌이’ 2년간 연재
30여 년 전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위치한 선일초등학교 학생이던 그는 방과 후면 인근 선일여고 앞에 나가 직접 그린 ‘스누피’ 그림을 팔았다.
아버지 구두를 아무리 열심히 닦아도 일주일에 300원을 벌기 어렵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누나’들에게 만화를 팔아 번 돈으로 3500원짜리 외제 장난감도 거뜬히 사곤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그의 만화를 이용한 ‘상술’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됐다. “당시 ‘마징가 제트’가 최고 유행 캐릭터였어요. 6개월 내내 집에 틀어박혀 100장을 꼬박 그린 걸 책자로 묶어 친구들에게 돈 주고 빌려줬어요. 지금으로 치면 미니 ‘만화방’을 차렸던 셈이죠.”
고등학교 때는 당대 최고 인기 국어학원 강사였던 서울학원 서한샘 씨(전 국회의원)의 수업을 듣기 위해 수강증을 그대로 따라 그리기도 했다. 날밤을 새서 기다려도 선착순으로 나눠주는 수강증을 받지 못하자 다른 친구의 수강증을 보고 베껴 그린 것.
“나중에 수강증을 검사하는 선생님께 걸려 된통 혼이 났죠. 아무리 급해도 그림 실력을 이용해 위조를 하다간 크게 혼날 수 있다는 교훈을 그 때 얻었습니다(웃음).”
어머니의 뜻대로 진학한 의대에서도 그의 만화 솜씨는 큰 도움이 됐다.
의대생에겐 공포에 가깝다는 일명 ‘해부학 땡 시험(종이 땡 치기 전까지 정해진 시간 동안 뼈와 신경, 근육 명칭 및 특성을 말이나 글로 설명해야 하는 시험)’도 타고난 미술 감각 덕분에 무리 없이 통과했다. 교과서 속 끝없이 이어지는 긴 문장 대신 그림으로 그려 내용을 기억하는 게 그만의 비법.
‘전신성 홍반성 낭창의 14가지 증상을 쓰시오’라는 식으로 복잡한 주관식 문제가 출제되는 전문의 시험 과정도 만화 덕분에 쉽게 넘겼다.
“일일이 이름과 증상을 외우자니 공부 양이 너무 많더라고요. 질병별로 특정 상황을 가정한 뒤 그 장면을 만화로 그려 외우는 방법을 선택했죠. 졸업할 때 보니 그렇게 그린 만화가 30여 가지나 돼 아예 책자로 만들어 후배들에게 넘겨줬어요.”
가톨릭대 신문 ‘성의학보’에 2년 넘게 연재했던 ‘까돌이’ 4단 만화 덕분에 의학도 치고는 시사 뉴스에 대한 관심도 많이 쌓았다.
까돌이는 ‘가톨릭대’의 애칭으로 당시 유행하던 만화 캐릭터인 ‘꺼벙이’와 ‘요철발명왕’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캐릭터다. 그는 지금도 복잡한 기능성 화장품을 직원 및 고객들에게 설명할 때면 까돌이 만화를 활용한다. 지난해 선보인 항산화 복합 화장품인 ‘우주인 화장품’도 활성산소의 나쁜 점과 화장품의 성능을 4단 만화로 쉽게 풀어 설명한 것을 조만간 직접 제품 홈페이지에 올릴 예정이다.
● 미술과 만난 의술
만화와 함께 커 온 그의 미술 감각은 의술을 발휘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얼굴을 올록볼록하게 만들어주는 필러 성형이나 박피 등의 피부과 진료 작업에 미적 감각은 필수이기 때문.
“필러 성형은 쉽게 말하면 피부충진제 등을 코나 턱, 팔자 주름 등에 주입해 얼굴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시술이에요. 10분이면 얼굴형까지 모두 바꾼다 해서 일명 ‘쁘띠 성형’으로도 잘 알려져 있죠.”
최근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발달하면서 대부분의 성형외과들이 컴퓨터를 활용해 성형 후 얼굴을 디자인하지만 이 대표는 여전히 자신의 감각에 더 의존한다. 환자가 원하는 시술 부위를 말해도 이 대표는 자신에게 전권을 넘겨줄 것을 부탁하고 모든 걸 알아서 처리한단다.
“처음엔 당연히 환자 분들도 불안해하셨죠. 시술 시간도 다른 병원에 비해 훨씬 짧은 데다 컴퓨터도 활용을 잘 안하니까요. 근데 자연스럽게 잘한다고 입소문이 퍼지더니 요즘은 국내 개인병원 중 필러 성형용 피부 충진제를 가장 많이 쓸 정도로 손님이 늘었습니다.”
얼굴의 어떤 부위를 어느 방향으로 당길지 각도나 방향이 생명인 ‘새얼굴 재생술(DSR)’에도 그의 디자인 실력과 미적 감각은 어김없이 활용된다. “보통 네임펜으로 환자 얼굴에 시술할 부위를 표시하거든요. 네임펜이 제가 만화 그릴 때도 즐겨 쓰는 도구다 보니 손에 익어서 그런지 쓱쓱 쉽게 잘 그려져요.”
그의 ‘거침없는’ 박피 기술은 일본에까지 소문이 났다. 그는 지금까지 일본 나고야 출신 피부과 의사 등 12명에게 그의 시술 비법을 전수했다.
“의학 지식이 풍부한 ‘스마트(smart)’한 의사보다는 창의적이고 감각이 살아 있는 ‘브라이트(bright)’한 의사가 되고 싶어요. 앞으로도 만화를 곁에 두고 꾸준히 만화처럼 살려고 노력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차앤박피부과 박피센터’ 대표이자 ㈜CNP차앤박화장품의 대표이사. 1989년 가톨릭대 의대를 졸업한 뒤 1992년과 1996년 동대학원에서 의학석사와 의학박사 학위를 각각 땄다. 현재 모교인 가톨릭대 의대 피부과 외래교수이자 케미컬필링연구회 총무이사 직을 겸임하고 있다. 2000년 동료 피부과 의사들과 함께 설립한 차앤박화장품은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위치한 본사에 신원료연구소와 임상연구소, 피부과학연구소 등을 운영한다. ‘필링시스템’과 ‘B.B.B크림’ ‘우주인크림’ 등 대표 코스메슈디컬 화장품으로 지난해 12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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