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입니다. 봄 햇살 아래서 책을 읽다가 무심코 한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목련도 벚꽃도 다 지고 벤치는 군데군데 녹슬고 모기만 앵앵거리는 그곳은 원래 봄이 아니면 별 볼일 없었다.” 김윤영의 소설 ‘비밀의 화원’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핍니다. 젓가락처럼 앙상한 가지에 손톱만 한 꽃망울들이 솟구쳐 있습니다. 어젠가 남도에 핀 꽃 소식을 기사로 읽었습니다. 바닥에서 고개를 내민 풀들이 기웃거리는 걸 보니 봄이 시작되나봅니다.
생각해 보면 많은 작가가 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연은 신전이다’라고 노래한 낭만주의 이후 봄은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굳어졌습니다.
봄이 가진 상징성은 비단 문학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생태학자인 레이철 카슨은 ‘침묵의 봄’에서 살충제의 남발로 봄의 전령이 찾아오지 않는 끔찍한 생태파괴의 현장을 ‘침묵하는 봄(silent spring)’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봄은 아름다움과 생명의 상징이며, 봄이 찾아오지 않고 침묵하는 것은 바로 죽음의 세계입니다.
봄은 왜 아름다운 것일까요? 봄이 진정 아름다운 것은 단순한 가능성이 화려한 실제가 되는 것에 있습니다. 피에르 레비는 씨앗을 가상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씨앗이 한송이의 봄꽃으로 피어나는 것을 ‘실제’라고 보았을 때 씨앗 그 자체는 일종의 가상공간이자 가능성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일례는 우리들의 몸 안에도 있습니다. 인간의 몸에는 무려 75조 개에 달하는 세포가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1초에도 수천 개의 세포가 죽어가고 또다시 수천 개의 세포가 태어납니다. 실로 엄청난 세계가 숨어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단백질 분자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백질의 집합체는 심장을 이루기도 하고 다리의 근육을 만들기도 합니다. 피에르 레비가 말한 것처럼 단백질분자라는 비생명체인 ‘가상’ 혹은 ‘가능성’이 진짜 생명체를 형성해냅니다. 그리고 그 생명체는 걷고, 말하며 생각합니다. 봄이 되어 씨앗이 꽃으로 피어나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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