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낮이어서인지 지하철 안은 한산한 편이었다. 출입문 쪽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반쯤 졸고 있을 때 누군가 앞에 와 섰다. 구걸을 위한 작은 통이 내밀어져 있었다. 주머니를 뒤적이며 문득 눈을 들어 상대를 보았을 때, 그만 심장이 멈출 것처럼 충격을 받고 말았다.
어색한 미소를 띤 청년은 시각장애인이었다.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의 가슴에 걸린 종이 팻말이었다. 거기에는 현대음악가 송율궁이란 이름과 함께 본인의 기사가 실린 신문·잡지 스크랩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아, 송율궁.
굳이 음악팬이 아닐지라도 그의 이름은 익숙하다. 80년대 후반, 그는 천재 음악가 소년으로 온 매스컴에 등장했던 인물이었다. 자신의 작품으로 해외 음악제에서 수두룩한 상을 받았고,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국내 유수의 음악가들과 작품 발표회도 가졌다. 그런데 그 천재소년은 어디로 가고, 지금 내 앞에 선 이 어수룩해 보이는 청년은 누구란 말인가.
정신을 차려보니 청년은 사라지고 없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지갑은 꺼내보지도 못했다.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내려야 할 정거장을 놓칠 뻔했다.그날 그에게 돈을 건네지 못한 일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최근 우연히 기사를 검색하다가 송율궁 씨의 소식을 접하게 됐다. 지난해 경기도 의정부의 한 중학교 축제에서 연주회를 가졌다는 얘기였다. 짧은 기사는 그의 연주회가 10년 만의 일이라고 밝히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송율궁 씨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서울 미아동의 한 빌라에서 어머니 송혜미자(66) 씨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그는 하는 일(어떤 일인지 알 것도 같다)이 있어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음을 미안해했다. 인터뷰는 송 씨의 방에서 이루어졌고, 어머니 송 씨가 배석했다.
- 옛날 생각이 납니다. 80년대 후반에는 대단했죠?
“일시적인 것 같아요. 그냥 ‘오늘 한 번 듣고 끝내자’하는 거죠. 우리 사회는 관심이 없는 사회인 것 같아요. 적극적인 관심이 있다면 제가 지하철에서 성금 모금 같은 걸 할 필요가 없겠죠.”
- ‘송율궁’이란 이름이 참 특이합니다.
“(송 씨 어머니) 율궁이를 임신했을 때 태몽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벽에 선명하게 글씨가 쓰여 있었어요. ‘높을 율’자에 ‘다할 궁’. 그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1983년 8월. 11살의 송율궁은 어머니와 함께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도쿄로 날아갔다.‘비행기 소리를 들어보는 게 소원’이라던 아들이었다. 15개국에서 내로라하는 음악천재들이 모인 이 대회에서 송율궁은 ‘나는 바람을 잡아타고서’라는 자작곡으로 3위를 했다. 이듬해에는 이 대회에 무려 100곡의 작품을 들고 출전해 문라이트상을 받았다.
1985년. 송율궁은 프랑스에서 개최된 전위음악제에 나가 ‘지구의 소리’로 세계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1986년에는 도쿄음악제에서 ‘그림자’로 포엠상 수상. 1987년에는 역시 도쿄음악제에서 ‘미인’을 발표해 우수상을 받았다. 1988년에는 드디어 국내에서 가장 ‘콧대’가 센 세종문화회관에서 제1회 송율궁 현대음악 작곡발표회를 열었다. 천재음악가 송율궁의 인생은 세상을 내려다보며 화려한 만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 ‘지구의 소리’가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곡은 어떤 작품인가요?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모아 놓은 겁니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뱃고동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도 있고 대화소리, 부부싸움 하는 소리, 자동차 소리 같은 것도 들어 있지요. 이런 다양한 소리들을 묶어서 들려주는 음악입니다.”
송씨가 피아노 앞에 앉더니 두르르하고 건반 위에 손가락을 놀렸다. ‘지구의 소리’였다. 빠르고 화려하고 기교적인 곡이다. 하지만 난해하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음악이었다.
“눈은 안 보여도 마음으로 느껴지는 게 있어요. 저는 김연아 선수가 경기를 할 때 음악만 듣죠. 그런데 음악을 듣고 있으면 김연아 선수가 움직이는 모습이 느껴져요. ‘아, 지금은 옆으로 도는구나’, ‘이것은 똑바로 가는 음악이로구나’하는 거죠.”
1997년. 그는 마지막 공연을 했다. 이후는 연주회를 열지 못하고 곡을 쓰며 준비만 하고 있다. 지하철에서 모금활동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송 씨의 꿈은 작지 않다. 음악당을 건립하는 것이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세상에서 문턱이 가장 낮은’ 공연장이다.
송 씨는 처음 모금을 시작한 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90년 6월 1일. 벌써 19년이나 됐다.
- 모금은 잘 됩니까?
“월수금은 집에서 쉬고 화요일과 목요일, 주말에 나갑니다. 하루 3∼4만원 정도 모이죠. 제일 많이 받아본 게 10만원짜리 수표였어요. 저를 알아보시고는 우시더군요. 우리나라처럼 무관심한 나라가 어디 있겠느냐면서. 앞으로도 계속 할 겁니다. 다행히 관심을 가져주는 분이 나타나시면 공연장은 빠른 시일에 될 것이고, 아니면 시간이 좀 더 걸리겠죠.”
송 씨를 말할 때 어머니 송혜미자 씨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고단한 삶을 홀몸으로 꾸리며 장애인 아들을 키운 어머니 송 씨의 인생은 라디오 다큐멘터리 드라마로 제작됐을 정도로 파란만장하다.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난 송혜미자 씨는 결혼 3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유복자로 율궁을 낳았다. 아이스크림·양말 행상을 하며 생활을 꾸려야 했다. 아들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따르기도 했다.
율궁의 음악적 자질은 어려서부터 드러났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소리에 민감했다. 꽃잎을 딸 때의 소리가 좋아 화단의 꽃을 모조리 따놓는 바람에 수위한테 경을 치기도 했고, 방공호 안에 돌 떨어지는 소리에 빠져 며칠이고 돌을 던져 넣다 민방위 훈련 때 방공호를 메운 장본인으로 지목받아 난리가 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에게 하모니카를 사주었다. 율궁은 하모니카를 만지작거리더니 익숙하게 ‘징글벨’을 불었다. 하모니카를 손에 쥔 지 불과 30분만의 일이었다. TV방송국에 견학을 가서는 피아노 반주를 세 번 듣고 그대로 계명으로 따라 불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언젠가는 빗소리를 듣던 율궁이 “엄마, 이중창이 올라와”했다. 빗소리에 섞여 신문배달원 두 명이 발을 맞춰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작은 사건은 어머니 송 씨가 아들의 음악적 자질을 깨우치는 계기가 됐다. 송 씨의 노력으로 율궁은 서울대 작곡과 교수에게 조언을 듣기도 했고, 연세대 음대 교수로부터는 악보 읽는 법과 화성학 등 음악적 기초이론을 배울 수 있었다.
송 씨는 아들을 위해 매일 밤 고무화판에 셀로판지를 대고 악보를 그렸다.
이 무렵부터 율궁은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11살 소년이 섬에서 일주일 동안 바닷물 속을 들락날락해서(그 결과 감기에 걸려 몇 개월을 고생했다) 만든 곡이 제1회 도쿄어린이음악제에서 율궁에게 3위상을 안긴 ‘바람을 잡아타고서’이다.
요즘 송율궁 씨는 가수 인순이 씨 사건으로 생각이 많다. 지난해 말 인순이 씨가 예술의전당에 공연신청을 했다가 퇴짜를 맞은 사건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1997년 자신이 겪었던 비슷한 사건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면서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작품발표회를 열기 위해 찾아갔더니 안 된다는 겁니다. ‘대중음악도 아니고 현대음악인데 왜 안 되냐’고 했더니 ‘음악이 시끄럽다’는 거예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더군요.”
얼마 뒤 행사가 있어 당시 조순 서울시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송율궁 씨가 조 시장에게 자신의 사정을 토로했다. 그냥 작품 발표회도 아니고 우리나라 교통난을 해소해보겠다는 취지의 연주회인데 왜 대관을 안 해주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조 시장은 송 씨의 말을 들으며 분개해 했다. 이후 송 씨는 희망하던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가질 수 있었다.
“고전음악, 현대음악, 전위음악만 예술이 아니잖습니까. 대중음악은 대중적인 예술이죠. 저도 예술을 하는 사람이니까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가슴에서 눈물을 흘려봤기에 인순이 씨도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송 씨는 최근 지인의 도움을 받아 인순이 씨를 돕는 내용의 UCC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이들 모자에게는 또 하나 소원이 있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을 TV로 보며 어머니 송 씨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우리나라 500만 장애자와 전 세계 장애자들에게 꿈과 용기, 희망을 주기 위해 백악관에서 송율궁 씨가 ‘지구의 소리’를 연주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이런 꿈이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어머니로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방 한 구석에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내기 위한 어머니 송 씨의 쓰다 만 편지가 흩어져 있었다. 송율궁 씨의 ‘세상에서 가장 문턱이 낮은’ 공연장은 무사히 건립될 수 있을까. 송 씨를 돕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호출기(012-819-4159)에 연락을 하면 된다. 전화를 걸어보니 자신의 소개와 모금의 취지, 성금 계좌번호를 알리는 송 씨의 음성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세상은 송율궁이란 이름을 잊었지만, 송 씨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자신의 손을 내밀고 있다. 그 손을 잡아주지 않는 세상에 조금은 화가 날 만도 하건만 그는 여전히 웃고만 있다. 언젠가 ‘송율궁의 소리’가 지구 전체에 울려 퍼질 날을 믿고 있는 것이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사진=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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