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臨政 90주년]<2>‘고난의 여정’ 발자취를 따라가다

  • 입력 2009년 3월 30일 03시 02분


백범의 비밀탈출 통로임정 탐방단이 24일 중국 자싱의 매만가 76호에 있는 김구 선생의 피난처를 방문해 2층 바닥의 비밀 통로를 올려다보고 있다. 이 통로를 빠져나오면 배를 타고 피신할 수 있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은 배. 자싱=전영한 기자
백범의 비밀탈출 통로
임정 탐방단이 24일 중국 자싱의 매만가 76호에 있는 김구 선생의 피난처를 방문해 2층 바닥의 비밀 통로를 올려다보고 있다. 이 통로를 빠져나오면 배를 타고 피신할 수 있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은 배. 자싱=전영한 기자
64년 전 그 자리에 선 독립유공자 후손들1945년 광복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이 중국 충칭의 임정 청사 앞에서 찍은 사진(왼쪽). 임정 탐방단에 참가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같은 장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충칭=전영한 기자
64년 전 그 자리에 선 독립유공자 후손들
1945년 광복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이 중국 충칭의 임정 청사 앞에서 찍은 사진(왼쪽). 임정 탐방단에 참가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같은 장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충칭=전영한 기자
‘백범 비밀통로’ 나룻배는 피맺힌 역사를 기억할까…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1919년 4월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5월 고난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해 4월 29일에 있었던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공원 의거로 일제의 압박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임정은 상하이 남서쪽에 있는 저장(浙江) 성의 성도 항저우(杭州)로 옮겼다. ‘임정 90주년,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함께 상하이에서 충칭까지’(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 이화학술원 공동 주관, 국가보훈처 후원) 탐방단도 임정의 발자취를 따라 25일 이곳에 도착했다. 시후(西湖) 호를 끼고 있는 항저우는 ‘천상에는 천당이 있고 지상에는 항저우와 쑤저우(蘇州)가 있다’는 말이 나올 만큼 경관이 빼어난 도시. 임정 청사는 호숫가 바로 뒷길 호변촌(湖邊村) 23호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항저우 시는 2007년 이곳을 복원해 기념관으로 꾸몄다. 1층 거실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고, 2층에는 전시실이 있다. 상하이 임정 청사에 비해 잘 정돈돼 있어 탐방단의 표정이 밝아졌다. 임정 요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자싱(嘉興) 난징(南京) 등을 오가며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자싱에 피난처를 두고 있었다.

자싱의 매만가(梅灣街) 76호에 있는 김구 선생 피난처에 도착한 탐방단은 바닥에 비상통로를 낸 선생의 침실을 보는 순간 숙연해졌다. 통로는 뒷문을 거쳐 시난(西南) 호와 연결됐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장진구 또는 장진이라는 가명을 썼던 김구 선생은 일제의 수색이 있을 때면 이 통로를 거쳐 뒷문 밖에 매어둔 배를 타고 피신했다. 지금도 작은 배 한 척이 그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경태 씨(26)는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지내야 했던 요인들의 생활을 생각하니 가슴이 찡하다”고 말했다.

1935년 11월 항저우를 떠난 임정 요인들은 난징을 거쳐 1937년 12월 내륙지방인 후난(湖南) 성의 성도 창사(長沙)로 이동했다. 일제의 중일전쟁 도발 이후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의 요인들이 모여 통합을 논의했던 곳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뜻 깊은 도시다. 하지만 임정 청사가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후손들을 안타깝게 했다.

창사에 도착한 탐방단은 김구 선생이 조선혁명당원 이운한에게 피격 당한 남목청(楠木廳) 옛터와 김구 선생이 수술을 받은 상아(湘雅)의원, 수술 이후 요양을 했던 악록(岳麓)산의 옛 가옥을 둘러봤다. 악록산 자락에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요양처는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동아일보 전영한 기자

임정 요인들은 일본군들이 중국 내륙으로 밀고 들어오자 다시 광저우(廣州)로, 류저우(柳州)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족을 포함해 100여 명이 버스와 기차, 배를 갈아타며 이동했던 당시 상황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양우조의 ‘제시의 일기’에 기록돼 있다.

“버스여행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이 생활에 저마다 적응해 가고 있었다. 도중에 시내에 들를 때마다 빨래를 하고, 다시 차로 돌아오면 버스 안에 노끈을 매어 놓고는 빨래를 널어놓았다.”

광저우에 남아 있는 임정 관련 유적지는 황포(黃포)군관학교와 중산(中山)대학. 임정이 1938년 7월 광저우로 옮기기 전부터 이 두 학교에는 한국인들이 입학해 교육을 받았다. 탐방단과 동행한 이재호 국가보훈처 연구관은 “하루 한 끼밖에 못 먹는 가난한 학생들이었지만 독립을 위한 일념으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문무(文武)를 닦았다”고 설명했다.

임정이 1938년 11월∼1939년 5월 머물렀던 류저우에선 노란색의 고풍스러운 건물이 탐방단을 반겼다. 당시 호텔로 사용되던 낙군사(樂群社)라는 건물로 중국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다. 류저우 시는 2004년 이곳을 ‘임정항일투쟁활동진열관’으로 꾸몄다.

진열관의 전시물은 임정의 이동 경로와 류저우에서의 활동을 보여줬다.

임정은 치장(기江)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오면서 긴 여정을 끝냈다. 충칭 시기(1940년 9월∼1945년 11월)의 임정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좌우연합의 임시의정원을 개원했으며,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하는 등 독립 이후 조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활동을 펼쳤다.

임정은 충칭 시에서 양류가(楊柳街), 석판가(石板街), 오사야항(吳師爺巷)에 이어 연화지(蓮花池)라는 곳으로 청사를 옮겼다. 이 가운데 양류가와 석판가 청사는 일본군의 공습으로 부서졌고 오사야항 청사는 남아있지만 곧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연화지 청사는 1995년 복원됐다. 양옥 다섯 채로 복원된 이 청사는 이전 도시의 청사와 달리 ‘정부청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번듯했다. 청사 구석구석을 오가던 탐방단도 “깨끗한 청사를 보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고 입을 모았다. 현지 안내원은 “부동산 회사에 넘어가 헐릴 뻔한 위기를 넘겨 복원됐고, 지금은 시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고 설명했다.

광복군 소속으로 제1지대와 충칭 임정에서 활동했던 최기옥 선생의 손자 최민석 씨(23)는 전시 사진에서 할아버지의 얼굴을 찾아냈다. 최 씨는 “광복군 공작요원들의 사진에서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모습이 눈에 띄었다”면서 “가족들에게 보여주려고 카메라에 담았다”고 말했다.

이채주 화정평화재단 이사장은 28일 탐방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이번 탐방을 통해 우리 선조들이 이국땅에서 겪었던 고통을 딛고, 이제 희망을 안고 돌아간다”면서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이 부디 시야를 넓혀 세계를 바라보기 바란다”고 말했다.

상하이·광저우·충칭=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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