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떡볶이의 세계화

  • 입력 2009년 4월 3일 03시 02분


끈적한 가래떡 대신 튀김·만두

고추장 대신 카레·칠리소스로

군고구마나 팥빙수 같은 ‘계절형’ 간식도 좋지만 더우나 추우나 우리 곁을 지켜주는 서민의 간식은 바로 ‘떡볶이’다. 어묵과 계란, 라면사리 등 다양한 재료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포용하면서도 본래의 맛을 잃지 않아 남녀노소 폭 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떡볶이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모습을 살짝 들여다보자.

○ 떡볶이에 반한 사람들의 축제

28일 농림수산식품부와 한국쌀가공식품협회가 주최하는 ‘떡볶이 페스티벌’이 열린 서울 서초구 양재동 aT센터. 넓은 행사장 한 쪽에서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재료를 나누어주고 고사리 손으로 직접 떡볶이를 만들어보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던 것.

이날 만들 떡볶이는 카레 가루를 넣어 노랗게 만든 카레맛 떡볶이였다. 떡 모양과 색깔도 다양했다. 자주색 별 모양, 노란 타원형 등으로 일반적인 ‘흰 가래떡’은 찾아 보기 힘들 정도였다. 재료로 받은 새우를 손질하고 큰 식칼로 양파를 조심조심 써는 아이들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야야, 조심해”도 연달아 터지고 ‘새우랑 야채를 볶으려면 프라이팬에 기름을 얼마나 둘러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토론도 이어졌다.

떡볶이가 완성될 무렵 한 여자 어린이가 탄성을 터뜨렸다. “야 이게 아니잖아∼!” 눈이 동그래져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들에게 이 어린이가 덧붙인다. “카레 떡볶이면 노래야 하는데 우리가 만든 건 왜 빨갛지?”

이날 50개 이상의 프라이팬에서 떡볶이가 만들어졌고, 그중 기자가 직접 확인한 결과 떡볶이 색깔이 노란 프라이팬은 채 5개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 손에 쥐어진 작은 포크는 입과 접시를 오가느라 바빴다. “우와, 내가 만들어서 그런지 더 맛있다”는 감탄사도 연달아 터지면서….

아이들의 열정에 뒤질세라 참여한 업체 부스에서도 다양한 맛과 색깔의 떡볶이를 선보였다.

“노란색은 카레, 검은색은 자장소스로 만들었습니다. 붉은 건 고추장과 칠리소스 두 종류고요, 흰색은 아카시아 꿀을 사용해 만든 소스로 버무렸죠.” 떡볶이 프랜차이즈 ‘해피궁’의 백인성 본부장이 설명했다. 일부 떡볶이는 떡을 튀겨 외국인의 입맛에 맞게 만들었다. “가끔 찾아오는 외국인 손님들이 떡의 ‘쫀득쫀득’한 질감을 싫어해 떡볶이를 먹지 않더라고요. 그런 느낌을 없애기 위해 떡을 튀겨 봤더니 외국인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퓨전 떡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꼬시나’에서는 각종 소를 넣은 떡을 만들어 떡볶이를 판매하고 있었다. “만두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했죠. 일반적인 쌀이나 밀가루 떡으로는 영양을 맞추는 데 한계가 있는데 이렇게 하면 맛도 영양도 다양하게 넣을 수 있으니까요.”

이 회사는 소에 맞는 소스도 각각 개발해 떡볶이를 만들고 있었다. 다진 고기를 채워 넣은 떡으로는 불고기 양념을 이용한 소스로 떡볶이를 만드는 식이다. 또 떡볶이가 식으면 떡이 함께 굳어지면서 맛이 없어지는 떡볶이의 특성을 감안해 뚝배기에 떡볶이를 조리해 내놓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 궁궐에서 신당동까지

떡볶이는 조선시대에 ‘떡찜’으로 불리며 궁중에서 사랑받던 ‘럭셔리’한 음식이었다.

1800년대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도 “궁중에서 흰떡과 등심살, 간장, 파 등으로 ‘떡찜’을 만들어 먹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순종도 때마다 즐겨 잡쉈다는 짭조름한 ‘궁중 떡볶이’는 어디서 유래됐을까.

떡볶이의 진화 “며느리도 몰라”

조선시대 궁중서 사랑받던 음식

6·25전쟁 거치며 서민 군것질로

신당동 명물서 세계인 입맛 ‘노크’

떡볶이 연구소에 따르면 2가지 설이 전해 내려온다.

하나, 17세기 전국 팔도에서 각종 맛난 대표 음식을 한양으로 올렸는데 이 중 파평 윤씨 종가에선 떡과 쇠갈비를 간장 양념에 볶아 올렸다고 한다. 잡채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요리로 생나물과 마른나물, 쇠고기를 주요 재료로 삼고 당면 대신 쌀떡을 넣어 간장으로 양념을 했다. 당시 입맛을 잃었던 왕이 이 떡볶이를 맛본 뒤 입맛을 되찾아 이후 궁중의 ‘정월 요리’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임금님도 맛 좀 보시라고 한양으로 올려 보낸 가래떡이 그만 올라오는 길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는 것. 이를 아깝게 여긴 수라간에서 머리를 써 떡을 썰어 간을 하고 불에 볶아 요리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궁중에서나 볼 수 있던 고급 음식 떡볶이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음식으로 변신한다.

‘아무도 몰라 며느리도 몰라’로 유명한 서울 중구 신당동 떡볶이 골목의 터줏대감 마복림 할머니가 그 시초다.

귀한 손님을 대접하러 중국음식점을 찾으셨던 마 할머니는 개업 기념으로 주는 가래떡을 실수로 친정아버지의 자장면 그릇에 빠뜨렸다고 한다. 차마 버리진 못하고 건져 먹었는데 오히려 더 맛이 좋아진 게 아닌가. 할머니는 춘장 대신 고추장에 비벼 먹어도 맛있겠단 생각에 이를 곧장 사업화했다. 그렇게 신당동 한 어귀에 노점을 차려 연탄불 위에 밀가루 떡과 야채, 고추장을 볶아 팔던 것이 현재 신당동 떡볶이 신화의 시작이다. 1950년대부터 마복림 할머니 노점 인근에 하나 둘 들어선 떡볶이 가게들이 1970년대에 본격적인 ‘떡볶이 골목’을 형성해 서울 길거리 음식 문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 21세기 한국…떡볶이 춘추전국시대

한때 ‘싸구려’ 정크푸드로 몰락하는 듯했던 떡볶이는 1990년대 이후 길거리부터 고급 음식점 메뉴판까지 꿰차면서 ‘국민 간식’으로 자리 잡는다.

최근에는 떡볶이 전문 프랜차이즈 업체들도 생겼고, 식품 업체들도 잇달아 집에서 해먹을 수 있는 초간단 냉장 떡볶이들을 선보이는 중이다. 이른바 ‘떡볶이 춘추전국시대’가 열린 셈이다.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현재 떡볶이 전문 프랜차이즈 업체는 아딸, 해피궁, 올리브떡볶이 등 33개로 전국 가맹점은 1100여 개에 이른다. 지난해 떡볶이용 떡의 시장 규모만 총 2100억 원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의 줄임말인 ‘아딸’은 2002년 서울 이화여대 앞 작은 분식집으로 시작해 2009년 3월 현재 400호점을 자랑하는 대형 프랜차이즈.

1972년부터 튀김을 만들어 온 아버지 고(故) 이영석 씨와 떡볶이의 명수인 딸 이현경 씨(아딸 이사)가 손을 잡고 만든 브랜드다. 중독성 있는 떡볶이가 허브를 넣어 튀긴 허브 튀김과 유독 잘 어울린다. 피자 박스처럼 깔끔하고 세심하게 만든 포장 용기도 센스 있다.

고 이 씨의 사위인 이경수 아딸 대표이사는 “장인어른께서 2006년 돌아가셨지만 30년간 고집해 오신 특유의 맛과 노하우는 본사 교육팀에서 그대로 지점들에 전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에서도 떡볶이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신당동 할머니들이 G마켓과 옥션 등 오픈마켓을 통해 즉석 떡볶이 판매에 나선 것. G마켓에 따르면 현재 온라인 판매 중인 신당동 떡볶이 집은 ‘삼대할먼네’ 등 10군데가량이다.

하루 전날 주문하면 라면 사리부터 육수까지 아이스박스에 담아 친절하게 배달해 준다고 하니 이제 지방의 떡볶이 마니아도 언제든지 즉석 신당동 떡볶이를 시켜 먹을 수 있다.

경기 불황의 여파로 외식 대신 직접 요리해 먹는 가정이 늘면서 ‘조리용 떡볶이’도 인기다.

신선식품이 전문인 풀무원은 궁중 음식 연구원으로부터 맛과 품질을 검증받은 ‘바로 조리 궁중 떡볶이’와 일반 쌀 떡볶이보다 떡이 가늘어 간이 잘 배는 ‘바로 조리 순쌀 떡볶이’를 판매 중이다.

○ 고추장과 가래떡 버리니 세계가 보인다

‘떡볶이는 매울수록 맛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그러나 ‘빅마마’로 유명한 이혜정 요리연구가는 현재 대중화되어 있는 가래떡과 고추장을 사용한 떡볶이가 사실은 떡볶이의 다양화와 세계화를 저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떡볶이는 우리나라 ‘음양오행’에 맞게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져야 하죠. 빨강 외에도 하양, 노랑, 초록, 검정 등을 녹여낼 수 있는 조리법이 나와 줘야 하는데 ‘떡볶이=매운맛’이라는 고정관념이 그걸 방해하는 면이 일부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다양한 영양도 제공할 수 없었다는 말도 덧붙인다.

“가래떡에 고추장으로 만든 떡볶이에는 탄수화물 외에 섭취할 수 있는 영양소가 많지 않죠. 그래서 식사 대신 떡볶이 먹었다고 하면 ‘식사를 그렇게 해서 어떡하니’라는 말도 하게 되었고요. 떡볶이의 재료와 색깔이 다양해지면 자연스레 영양소도 골고루 배합되지 않겠어요.”

농식품부와 이 씨는 올 5월 떡볶이를 들고 미국을 찾을 예정이다. 미국 뉴욕 주 롱아일랜드에 있는 유명 요리학교인 ‘존슨&웨일스’에서 떡볶이 설명회를 열기 위해서다.

“떡볶이 설명회라고 해서 떡볶이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러 가는 건 아니에요. 기본적인 것들만 설명해 주고 나머지는 요리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아이디어에 맡기는 거죠.”

이 씨는 떡볶이의 ‘기본’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을 해 준 뒤 학생들에게 세계 각국의 입맞에 맞는 떡볶이를 만들어보라고 주문할 예정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각각 모국(母國) 입맛에 맞는 떡볶이 요리를 개발해 오면 그것이 바로 ‘떡볶이의 세계화’라는 것.

이 씨는 이 행사에서 고추장 떡볶이에 묻혀 잊혀진 한국 고유의 다양한 떡볶이 맛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아이디어도 함께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국민 간식’과 ‘수라상에 오르던 음식’이라는 두 가지 타이틀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정도로 스펙트럼이 넓은 떡볶이는 이제 가래떡과 고추장이라는 옷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세계로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다.

글=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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