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이 지키지 않는 약속을 혼자만 지키는 얼간이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타인을 욕하지 않으며 참말만 하고 매일매일 반성하며 살겠다는 약속!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메디컬 존의 병원들은 문을 꼭꼭 닫아걸고 시원한 인공풍에 의지하여 하루하루를 보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자연풍을 받아들이는 곳은 노윤상 박사가 원장으로 있는 앵거 클리닉뿐이다. 이 클리닉의 유일한 간호사 최미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복도를 오갔다. 간호로봇 두 대가 더위를 먹고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다. 실내 근무가 원칙인 간호로봇에게는 적정 습도와 온도 유지가 필수적이다.
"간호사!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오? 원장님은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소?"
최볼테르가 진료실 문을 열고 나와서 미미를 불러 세웠다. 오늘은 석 달 동안의 상담치료를 마치고 최종 소견을 듣는 날이다. 완쾌 의견이 나오면 더 이상 쿼런틴 게이트에 올 이유가 없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도착하신다는 연락이 왔답니다. 아, 저기 오시네요."
미미가 열린 창문 밖을 손으로 가리켰다. 노윤상 원장이 이마의 비지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바쁘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볼테르는 미소 짓는 미미를 향해 짜증을 냈다.
"이 클리닉엔 에어컨 시설도 없소? 지금 기온이 얼마나 높은데 문을 죄다 열어놓은 거요? 누구 쪄 죽는 꼴 보려고 그럽니까?"
미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했다.
"제 잘못이 아니고요, 원장님 방침이에요."
그 순간 노원장이 복도로 들어섰고, 미미는 고장 난 간호 로봇들을 세워놓은 옆방으로 자리를 피했다.
"지금 몇 신 줄이나 아십니까? 2시 하고도 10분이나 더 지났습니다. 약속 시간을 1시간 10분이나 어기셨어요."
노원장은 볼테르의 불평에 대꾸도 없이 간호사부터 찾았다.
"간호사! 최 간호사!"
옆방에서 미미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선 문을 반 만 열고 분위기를 살폈다.
"혹시 방문종 군에겐 연락 온 거 없었나?"
"없습니다, 원장님!"
노원장이 입으로 쩝! 소리를 내며 오른손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그만 나가보라는 뜻이다. 문이 닫히자마자, 볼테르가 따지고 들었다.
"다들 어디 갔습니까? 오늘 그룹으로 모여 석 달 동안의 상담치료를 마무리 짓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방문종, 걔는 되먹지 못한 녀석이니 결석할 수도 있겠지만, 나머지 두 사람, 도그맘 여사와 변주민 선수는 왜 아직 오지 않는 겁니까?"
노원장이 왼손으로 안경테를 들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콧등을 두 차례 쓸어내린 다음 되물었다.
"정말 몰라서 이러는 겁니까 아니면 딴 뜻이 있는 겁니까?"
"몰라서 이러다뇨? 딴 뜻은 또 뭐죠?"
"뉴스도 안 보십니까? 지금 특별시 전체가 연쇄 살인 사건 때문에 난린데, 모른단 말입니까?"
볼테르가 두 눈을 끔뻑거리며 노원장의 설명을 되짚었다.
"연쇄 살인?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이 말씀입니까?"
"도그맘 여사와 변주민 선수는 오늘 모임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살해당했으니까요."
볼테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 몰랐습니다. '배틀원 2049'를 위해 연구실에서 계속 밤을 지새웠거든요. 글라슈트에만 집중했습니다. 헌데 어딜 그리 급히 다녀오는 길이신지……? 두 사람이 오지 않더라도 약속은 약속 아닙니까? 글라슈트를 정비할 시간을 벌써 1시간 30분이나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빨리 완쾌 소견을 밝혀주십시오. 가봐야 합니다."
두 환자의 불행은 불행이고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은 것은 노윤상 원장의 큰 잘못이다. 노원장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잇달아, 도그맘 여사와 변주민 선수가 살해당했습니다. 우연일까요?"
"우연일까요…… 라뇨?"
"피살자 두 사람이 모두 노윤상 앵거 클리닉의 환잡니다. 이게 우연인가 이 말입니다."
볼테르는 비로소 노원장의 질문이 노리는 지점을 알아차렸다.
"그게 우연이 아니라면…… 다음은 나 최볼테르나 말썽꾸러기 방문종이 죽을 차례다 이 말입니까?"
"퍼펙트! 그래서 방문종 학생이 자주 가는 거리와 빌딩들을 돌아보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헌데 어디에도 없습니다.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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