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시절’을 떠올릴라치면 표지 속 소녀부터 떠오른다. 노란머리, 연둣빛 눈, 주근깨 가득한 볼에 도톰한 입술. 주인공인 엔리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순 없지만, 처음부터 함께 쓰고 그린 것처럼 그런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려나 그녀는 시큰둥하고 무덤덤하다. 뒤표지 문안처럼, “바보같이… 삶, 사랑, 인생… 그런 거였군!” 하는 표정으로.
엔리카는 그렇게 다가왔다. 애초 ‘대산세계문학총서’ 중의 한 권인 엘사 모란테의 ‘아서의 섬’을 편집할 때부터 지중해 물빛처럼 새파랗고 잔잔한 이탈리아 성장소설에 매료되었다. 간결한 문체에 군더더기 없는 번역도 읽는 이의 내면을 자꾸만 이국의 풍경 위에 올려놓았다. 때마침 ‘문지푸른문학’ 시리즈를 준비하던 참이라 번역자에게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는 ‘본격 성장소설’을 소개해줄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랬더니 작가와 작품이 너무 좋아서 이미 몇 년 전부터 번역해둔 원고가 있다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 만난 원고가 다치아 마라이니의 ‘방황의 시절’이다.
이 책은 작가에게 ‘포르멘토르 국제상’을 안겨준 대표작으로 이탈리아에서 초판이 나왔을 때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단다. 열일곱 살 여고생이 여러 부류의 남성들을 경험함으로써 삶과 인생에 대해 눈뜨게 된다는 내용이니 보수적인 이탈리아 문단에 불러일으켰을 파장은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가난한, 여자, 고등학생’인 주인공이 ‘성급하게’ 어른이 되고자 하는 과정에서 치러내는 성장통은 시대를 뛰어넘어 오롯했다. ‘너무 센 게 아닐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지만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말갛게 생을 응시하게 만드는 매력은 출간 결정을 쉽게 내리도록 했다.
이 책은 만화와 장르문학과 영화가 적당히 버무려져야 청소년문학으로 인식되는 한국 출판 시장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편집부의 생각과도 잘 맞았다. 불합리한 성인들의 세계를 우회하는 판타지는 진정한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천박한 이기주의자, 지식인을 가장한 물신주의자, 사회화가 덜 된 이상주의자 등 ‘방황의 시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과 어깨 맞대고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청소년들의 ‘진짜 리얼리티’가 아닐까.
이 책은 지난해 겨울, ‘불황의 연말’에 출간되어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탈리아 문학이 생경한 데다 우후죽순 나오는 청소년 소설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엔리카라면 여전히 시큰둥하고 무덤덤하게 이 현실을 직시했겠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올해 독자의 관심을 기대해 볼 밖에.
원종국 문학과지성사 문지푸른책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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