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사 전문가인 윤용구 인천도시개발공사 문화재과장(전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실장)은 12일 “기원전 45년 낙랑군 소속 25개 현의 가구(戶)와 인구 수, 전년 대비 가구 수 증감률이 기록된 공문서 목간 3점의 사진을 입수해 원문을 판독한 결과 평양,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에 걸친 낙랑군 현들의 정확한 위치를 밝힐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
목간 사진은 지난해 11월 북한 사회과학원이 펴낸 자료에 수록돼 있다. 이 목간의 존재 사실과 일부 내용은 2007년 윤 과장이 북한 사학자의 글을 통해 국내에 알린 바 있으나 이번에 처음으로 원문을 모두 판독했다. 이 목간은 ‘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多少□簿(낙랑군초원4년현별호구다소□부·□는 판독 불가)라는 제목으로 인구센서스 결과를 약 710자로 적었다. 한국목간학회(회장 주보돈 경북대 교수)는 11일 10여 명의 학자가 모인 가운데 비공개 판독회를 열어 이 목간의 내용을 검증했다.
목간에 따르면 기원전 45년 낙랑군의 가구는 4만3845호, 인구는 28만4261명이었다. 목간에는 평양, 평안남도, 황해도, 함경남도, 강원도 지역에 해당하는 낙랑군의 25개 현의 지명이 모두 기록돼 있다. 낙랑군이 이 일대에 걸쳐 있었다는 증거다. 그동안 한국, 북한, 중국학계에서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한반도(대동강 유역), 중국 요동, 요서 지역 등으로 논란을 벌여왔다.
사랑하는 호동왕자를 위해 자명고를 찢은 낙랑공주가 살았던 낙랑국으로 알려진 낙랑군 소속 부조(夫租) 현(현재 함경남도 함흥시)에는 당시 1150가구(인구수 8000여 명·‘8천(千)’자만 판독 가능)가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25개 현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살았던 조선(朝鮮) 현(옛 고조선의 중심 지역)은 현재의 평양으로 5만6890명(9678가구)이 산 것으로 집계됐다. 인구수가 가장 적은 현은 현재의 황해북도 인산군 지역인 제해(提奚) 현으로 1303명(173가구)에 그쳤다.
윤 과장은 “조선 현과 제해 현의 인구수 차는 40여 배에 이른다”며 “낙랑군을 설치한 뒤 63년이 지난 시점까지 현별 규모를 맞추지 못한 것은 옛 고조선 지역의 세력 판도를 그대로 인정해 현을 구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의 지배력이 약해 고조선 사회의 전통과 생활 방식이 그대로 유지됐다는 설명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