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 청소년에게 희망을 심어주려는 맹인교장(정인겸)과 비장애인인 교감(권경희)이 이끌어오던 맹인학교는 앞을 못 본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전학생 시우(전종배)의 등장으로 혼란에 빠진다.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시우는 “내 인생이 재가 된다 해도 난 앞을 보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어”라면서 맹인의 현실에 적응해가던 학생들의 삶이 가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던 모범생 기로(이갑선)는 그런 시우가 영원한 빛을 꿈꾼다면서 사실은 학교를 영원한 암흑으로 내몰고 있다며 강하게 맞선다. 기로는 “나는 삶을 지켜. 네가 숨통을 끊으려는 우리 모두의 삶을. 아무리 지독하고 미칠 것같이 아파도, 심장 터지게 행복하지 않아도”라며 시우를 학교에서 추방하려 한다.
한태숙-서재형 씨의 뒤를 이어 극단 물리의 차세대 연출자로 꼽히는 오김수희 씨의 연출 데뷔작인 연극 ‘맹목’은 이렇게 삶에 대한 대조적 시각의 대결을 힘 있게 펼쳐냈다. 시우가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이자 지독한 회의주의자라면 기로는 삶을 긍정하는 현실주의자이자 낙관론자다. 스페인 극작가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원작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1946년)는 기로보다 시우의 시각에 방점을 찍었다. 프랑코 독재정치에 안주하려는 스페인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시각의 폭력을 비판하고 장애인의 인권을 중시하는 21세기적 현실에서 이 작품은 또 다른 박진감으로 다가선다. 소록도 나환자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조백헌 원장과 냉소적인 나환자 그룹의 갈등을 그린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대척점에 서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당신이 시각장애인이라면 과연 시우와 기로 누구의 길을 택할 것인가. 그런 맥락에서 시우와 기로의 논쟁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무대 조명을 천천히 줄여 완전한 어둠 속에 대사만 들리게 함으로써 관객이 시각장애를 직접 체험하게 한 연출이 돋보였다. 26일까지. 서울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2만5000원. 02-762-0010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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