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73>

  • 입력 2009년 4월 16일 14시 12분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

6월 28일 저녁 9시, 로봇격투기 대회 '배틀원 2049' 데스 매치 16강전이 시작됐다. 32강전을 치른 후 사흘이 지났지만, 그 시간을 여유롭게 보낸 팀은 많지 않았다. 우승 후보 로봇 팀들은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쇼케이스를 치르고, 광고를 찍느라 바빴다. 32강전에서 힘겹게 이긴 로봇 팀들은 망가진 부품을 교체하고, 프로그램을 다시 짜고, 로봇의 움직임을 재정비하느라 바빴다.

6월 28일 저녁 11시 30분, 데스 매치 16강전의 마지막 경기인 자이언트 바바 III (히로시마, 우승확률: 8/100)와 글라슈트 (서울, 우승확률: 2/100)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혼다자동차의 전폭적인 홍보와 특유의 쇼맨십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자이언트 바바 III가 나오는 경기라서 팬들이 많았다. 상암동 로봇 격투기 전용경기장에 빼곡히 들어찬 관중은 자이언트 바바 III를 '자바 쓰리!'로 연호했다.

"자바 쓰리! 자바 쓰리!"

사이스트(SAIST) 차세대로봇연구소 최 볼테르 교수 팀의 글라슈트는 '홈구장의 이점'을 별로 얻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바 쓰리는 초반부터 경기의 주도권을 잡았다. 특유의 코믹한 표정과 빠른 스텝으로 글라슈트 주변을 맴돌며 정확한 위치 추적을 어렵게 만들었다. 무하마드 알리 스타일로 갑자기 파고들어 주먹을 뻗고 로 킥을 날리는 바람에 글라슈트의 왼쪽 다리가 단숨에 망가졌다. 초경량 고파워 DC 모터 NT35325로 구성된 발과 산요덴키 고파워 스테핑 모터 RX567654로 이루어진 무릎 관절의 부상이 심했다. 글라슈트의 물체위치추적 시스템은 자바 쓰리의 빠른 몸놀림을 파악하지 못했다.

경기가 중반으로 치닫자, 자바 쓰리는 새로운 공격을 선보였다. 제 자리에 서서 두 팔을 쭉 뻗은 채 손바닥을 펴고 글라슈트의 공격을 기다렸다. 자바 쓰리의 두 손은 하트 모양에 가까웠다. 글라슈트가 그 사랑의 표시를 잡기 위해 다가가면, 자바 쓰리는 빠르게 손을 빼면서 니 킥으로 글라슈트의 오른쪽 허벅지를 찍었다. 두 다리가 망가지면 바로 달려들어 글라슈트의 가슴을 뜯어낼 작전이었다. 그러기를 여섯 차례. 볼테르가 접근하지 말라고 번번이 외쳤지만, 글라슈트는 '피리 부는 사나이에 홀린 어린아이 마냥' 자바 쓰리의 하트 손에 맥을 못 췄다.

볼테르가 타임을 부르고 글라슈트를 잠시 쉬게 했다. 등에 달린 중앙 스킨을 열어 전체 시스템을 점검하고, 자바 쓰리의 하트 손에 현혹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트를 향한 글라슈트의 무조건적인 접근은 프로그램 버그로 추측되었지만 수정할 시간이 없었다.

다시 경기가 시작됐을 때, 자바 쓰리는 격투를 마무리할 기세였다. 플로어 정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다시 하트 손을 만들었다. 가늘게 찢어진 눈에서 빨간 빛이 우스꽝스럽게 깜빡였다. 회심의 일격을 노리는 것이다.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

러시아의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가 쓴 시구절이 떠올랐다. 인간이란 '치명적인 유혹'임을 알면서도 그것에 빠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가 아닌가? 볼테르는 우리가 만든 로봇도 그렇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글라슈트가 자바 쓰리에 1.5미터쯤 다가왔을까.

자바 쓰리가 갑자기 손을 내리더니 몸을 오른쪽으로 틀면서 오른쪽 주먹을 뒤로 충분히 뺐다가 힘차게 휘둘렀다. 글라슈트의 주요 정보처리 장치 AIP3500과 관련 칩들이 대부분 왼쪽 귀 뒤쪽에 몰려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 순간, 글라슈트 역시 양손을 돌리는가 싶더니, 두 어깨에 달린 파워모터를 일제히 최대로 가동해 왼쪽 허공을 향해 회오리 펀치를 날렸다. 자바 쓰리는 얼떨결에 날아온 주먹 한방으로 '죽음 신호'를 낼 수밖에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로봇은 글라슈트였지만, 바닥에 쓰러진 로봇은 자이언트 바바 III였다.

관중도 놀랐지만 무엇보다 놀란 사람은 볼테르였다. 로봇도 뒷걸음질 치다가 개구리를 잡을 수 있구나. 다 진 경기였지만 운이 좋았다. 한 경기를 더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한 템포 늦게 관중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16강전 마지막 경기가 끝나자, <보노보> 12시 마감뉴스가 이어졌다. 상암동 경기장에는 <보노보>의 빈센트 노호 기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빈센트 노호 기자, 방금 16강전이 끝났지요? 경기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

스튜디오의 앵커가 빈센트 노호 기자를 불러 경기 소식을 물었다.

"네, 방금 전 16강 마지막 경기, '자이언트 바바 III 대 글라슈트'의 경기가 끝났습니다. 도박사들이 예상한 우승확률 8/100인 자이언트 바바 III가 사이스트 차세대로봇연구소의 글라슈트에게 아깝게 졌습니다. 자이언트 바바 III는 유리하게 경기를 이끌었지만, 글라슈트가 초강력 파워 엔진으로 날린 회오리 훅을 맞고 목이 부러졌습니다. 16강전의 마지막 경기 자이언트 바바III와 글라슈트의 주요장면을 다시 보시죠."

홀로그램으로 두 로봇의 경기가 상영된 후, 앵커가 다시 빈센트 노흐를 찾았다.

"노흐 기자, 흥미로운 경기였네요. 그럼 16강전 전적을 정리해 주시지요."

"16강전은 그야말로 대격돌이었습니다. 닥터 루스벨트 (동경, 우승확률: 1/100)를 니킥 한방으로 날려버린 슈타이거 (베를린, 우승확률: 12/100)와 라이징 브라이거 (로마, 우승확률: 1/200)의 목을 비틀어 머리를 뜯어버린 졸리 더 퀸 (뉴욕, 우승확률: 11/100)이 일찌감치 8강에 합류했구요, SRX 9000 (브리스톨, 우승확률: 4/100)의 팔을 자르고 주먹으로 가슴을 두 조각낸 무사시 (동경, 우승확률: 25/100)와 지능적인 게임으로 카라데 마스터 (오사카, 우승확률: 3/100)의 중앙정보처리회로를 산산조각낸 M-ALI (예루살렘, 우승확률: 7/100)도 많은 로봇공학자들의 예상대로 8강에 합류했습니다."

"이번 16강전에서는 이변도 있었다면서요?"

"네, 그렇습니다. 새로운 다크호스 팀들이 놀라운 경기력을 뽐냈습니다. 우선 T-KUBIRO (상하이, 우승확률: 1/100)를 힘겹게 이기고 올라온 R-AURA 6000 (싱가포르, 우승확률: 3/100)가 달타니어스 7000을 쓰러뜨리고 8강에 진출한 것이 이변이었는데요, R-AURA 6000은 지난 1주일 사이 더 강해진 인상이었습니다. 아이언 반달레이 (리우데자네이루, 우승확률: 3/100)도 다크호스로 떠올랐는데요, 풀메탈패닉 K (덴버, 우승확률: 4/100)과의 대결에서 '2미터 점프 돌려차기'를 선보여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해 앞으로 우승후보들과의 대결에서도,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것 같습니다."

빈센트 노흐 기자가 홀로그램을 통해 8강 일정을 알려주는 모드로 돌아섰다.

"오늘 치러진 경기에서는 밴너 사바테 5 (파리, 우승확률: 2/100)가 메탈릭 신센구미 (오사카, 우승확률: 2/100)을 이기고 8강전에 합류했구요, 방금 보신대로 자이언트 바바 III를 힘겹게 누르고 글라슈트가 8강에 마지막으로 합류했습니다. 8강전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양상으로 전개될 것 같습니다. 방금 '배틀원 2049' 운영위원회에서는 화려하고 박력 넘치는 경기를 위해 격투 로봇의 수리 및 정비 기간을 예정보다 24시간 더 연장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7월 2일 저녁 9시부터 8강전이 시작됩니다. 로봇격투기 중계는 보. 노.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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