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곽재구 씨의 ‘사평역에서’, 김용택 씨의 ‘섬진강’, 김지하 씨의 ‘타는 목마름으로’, 정호승 씨의 ‘슬픔이 기쁨에게’…. 누구나 한 번쯤은 애송해봤을 이 시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창비 시선으로 출간된 시집이라는 것이다.
1975년 신경림 씨의 ‘농무’를 시작으로 한국 시사에 발자취를 남긴 시집을 펴내온 창비시선이 300번째를 맞아 기념시선집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박형준 이장욱 엮음·창비)를 펴냈다. 창비시선 201∼299번을 펴낸 시인 86명의 작품에서 ‘사람과 삶’을 주제로 한 작품을 한 편씩 뽑아 엮었다. 창비시선에는 신경림, 이시영, 박형준, 나희덕, 문태준 씨 등이 참여했다.
창비시선은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문학과지성 시인선’ ‘오늘의 시인총서’와 함께 시집 분야에서 ‘상업출판’의 시대를 열었다. 신경림 씨는 “그전까지만 해도 인세 개념도 없었고 대부분 자비로 500부 정도 시집을 찍어내는 게 전부였다”며 “창비가 정부 박해를 받던 때여서 이렇게 장수하리라곤 생각을 못했다”고 말했다.
농민들의 실상을 일상어로 생생히 노래한 신경림 씨의 ‘농무’는 모더니즘 경향이 주를 이루던 한국시단에 충격을 줬다. 이시영 씨는 “이 무렵 유신체제, 긴급조치가 선포되고 이후 민주운동이 급격하게 전개되면서 창비시선은 시의 언어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전언’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지하 씨의 ‘타는 목마름으로’(1982년)가 나왔을 때는 당시 편집장이던 이시영 씨가 안기부에 연행됐고 조태일 씨의 ‘국토’(1975년), 황명걸 씨의 ‘한국의 아이’(1976년)는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판매가 금지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대표적인 베스트셀러가 잇따라 나왔다. 가장 많이 판매된 시집은 최영미 씨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51만 부가 넘었다. 정호승 씨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박노해 씨의 ‘참된 시작’ 등이 10만 부 넘게 나갔다. 2000년 이후에도 김선우 씨의 ‘내 혀가 입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김사인 씨의 ‘가만히 좋아하는’ 등 주목받는 시집들을 펴냈다. 나희덕 씨는 “창비시선이 1970, 80년대를 거치며 사회적인 공동체 정신을 일궈왔다면 이제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젊은 시인들에게도 좀 더 문호를 열고 언어적 공동체로 거듭나기 바란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