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만들고 보자?
도로건설 앞다퉈 발표…대부분 하천변 레저용
도심선 보행자 뒤섞여…2년새 자전거 사고 3배로
인식부터 바꿔야!
자전거 보험-보관소 등 수요자 대책 미흡
차도 줄여 전용로 조성…“車흐름 방해” 반대에 막혀
파리지앵(프랑스 파리 사람)들은 자전거도로를 ‘문명인의 공간’이라고 부른다. 이전까지 자동차가 문명인의 상징이었다면 앞으로는 녹색 교통수단인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문명인이라는 의미다.
‘녹색성장’ 바람을 타고 한국에서도 자전거 열풍이 뜨겁다. 정부는 2018년까지 3114km의 전국 자전거도로 네트워크를 만들기로 했고, 서울시는 지난해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자출족·自出族)을 위한 207km의 자전거 전용도로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앞 다퉈 자전거도로 건설 계획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자전거도로 등 인프라를 늘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자전거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고, 자전거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자전거는 절대 교통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 정부는 현재 1.2%에 불과한 자전거의 교통수단 분담률을 2012년까지 5%까지 높일 계획이다. 16.6%인 자전거 보급률도 30%로 확대하기로 했지만 ‘문명화’를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이 너무 많다.
○ 자전거는 교통수단이고 싶다
지난해 9월 22일 ‘차 없는 날’을 맞아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관저에서 집무실까지 자전거로 출근했다. 하지만 이 장면을 보고 많은 자출족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로교통법상 자전거도 차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자출족들은 자전거도 자동차와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차 없는 날’을 승용차가 없는 날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차라리 걸어서 출근하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지적이었다. 사단법인 자전거21의 오수보 사무총장은 “자전거 정책을 만드는 공무원들의 인식이 직접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며 “대통령부터 자전거를 교통수단이 아닌 놀이기구로 인식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자전거를 교통수단으로 인정하지 않는 현실은 곳곳에 널려 있다. 정부가 발표한 우리나라 자전거도로의 총연장은 9170km다. 하지만 이 중 90% 정도가 자전거·보행자 겸용 도로다. 사실상 이름뿐인 자전거도로로, 대부분의 도로가 보행자들에 의해 점유되거나 자동차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그나마 있는 자전거 전용도로는 대개 도심이 아닌 하천변 등에 레저용으로 만들어져 있다.
또 출퇴근용으로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21일 허준혁 서울시의원이 서울지방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06년 268건이던 서울시내 자전거 사고는 지난해 763건으로 3배가량 늘었다. 사고는 특히 10대에서 가장 많았고, 시간별로는 10대의 하교 시간인 오후 4∼6시가 가장 많았다. 3년간 사망자는 32명이나 된다.
현재는 자전거보험이 없어 자전거를 타다가 사고를 당해도 보상받을 길이 없다. 자전거보험이 올 상반기 도입될 예정이지만 보험적용 범위를 폭넓게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전거 수요를 창출하려면 도로만 늘릴 게 아니라 주륜장(자전거 주차장)과 도난 방지 시설 등을 함께 갖춰야 하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아직 언급되지 않고 있다. 6개월 전부터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서 동작구 보라매공원까지 자전거로 출퇴근한다는 정보기술(IT)기업 ㈜몬도시스템즈의 정철 대표이사는 “정부와 지자체들이 너무 겉으로 보이는 수치에만 치중하는 인상이다. 많은 사람이 자출을 시도했다가 2주도 안 돼 포기한다. 정부와 지자체는 어떻게 해야 이런 사람들이 계속 자전거를 탈지를 수요자의 처지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 각종 규제와 관습의 벽 넘어야
서울시가 만드는 207km의 자전거 전용도로는 기존의 자전거도로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시는 기존 자동차도로의 1개 차로를 없애거나 차로 폭을 줄여 자전거 전용도로로 바꾸는 ‘도로 다이어트’ 방식을 채택했다. 자전거가 교통수단이 되려면 차도에서 차와 함께 다녀야 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것. 하지만 도로를 관리하는 경찰청의 교통규제심의에 가로막혀 진척이 더디다. 시는 당초 지난해까지 천호대로와 연서로 16.4km의 도로 다이어트 공사를 완료할 계획이었지만 교통규제심의가 늦어지면서 아직 착공도 하지 못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우리로서는 차량 소통 흐름과 운전자 및 자전거 통행자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어 심의를 쉽게 내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자전거에 대한 열린 문화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프랑스나 네덜란드 등 외국의 선진국에서는 정장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직장인을 쉽게 볼 수 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조르조 아르마니는 자신의 브랜드를 딴 자전거를 출시한 데 이어 자전거 탈 때 입는 양복을 만들겠다고 할 정도다. 하지만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양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 받기 십상이다. 땀에 젖어 회사에 와도 씻을 공간도, 자전거를 놔 둘 곳도 없다. 오히려 “운전에 방해가 된다” “주차 공간도 부족하다”며 자전거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백남철 책임연구원은 “자전거 교통수단 분담률이 1% 내외였던 미국 포틀랜드 시가 분담률을 6%로 끌어올리는 데는 30년이 걸렸다”며 “자동차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의 습관을 하루아침에 한꺼번에 바꾸기는 힘들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인식 전환을 위해 꾸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 ‘자전거 천국’ 비결은
창원, 자전거터미널 120곳… 자출족엔 수당지급
상주, 인구 11만에 8만7000대 수송분담률 15%
21일 오전 8시 5분 경남 창원시 상남동 성원아파트 주차장.
박완수 창원시장이 양복 차림으로 자전거에 올랐다. 집에서 2.5km 떨어진 용호동 시청까지 걸리는 시간은 15분 정도. 자전거로 출근하는 자출족 3년차인 박 시장은 가까운 동사무소 출장 때도 자전거를 이용한다.
전국에 자전거 타기 바람이 불고 있다. 자전거 이용을 늘리기 위해 자치단체장들이 자전거로 출퇴근하거나 자전거를 이용하는 시민에게 갖가지 혜택을 주는 곳도 많다. 경북 상주시와 경남 창원시, 울산, 서울 송파구 등은 국내의 대표적인 ‘자전거 천국’이다. 하지만 자전거 도로 대부분이 보행자 겸용이어서 사고 위험이 상존하는 등 인프라는 여전히 부족한 현실이다.
○ “자전거 타기는 우리가 최고”
경북 상주시는 자전거의 종가(宗家)임을 자처하고 있다. 4만2000여 가구에 인구 11만 명인 상주시의 자전거 보유 대수는 8만7000대. 한 가구에 평균 두 대꼴로 자동차(4만 대)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이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상주 시가지는 자전거 물결로 장관을 이룬다. 자전거 수송 분담률도 15%로 전국 최고 수준이다.
경남 창원시도 ‘자전거 천국’을 만들기 위해 독특한 시책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10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이 부착된 공영자전거 ‘누비자’(누비다와 자전거의 합성어) 430대를 터미널 20곳에 배치한 데 이어 올 상반기 중 34억 원을 들여 누비자 1000대, 터미널 100곳을 추가 설치한다. 지난달 누비자 이용실태를 조사한 결과 전체 이용횟수는 2만1453회(하루 평균 215회)였다. 창원시는 한 달에 15일 이상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근로자에게는 전국 처음으로 월 3만 원씩의 자전거 수당도 지급하고 있다.
서울 송파구는 일찍부터 ‘자전거 시대’를 준비해 온 자치구로 2003년 서울시 자치구 가운데 처음으로 자전거 교통문화팀을 만들었다. 이듬해 2월 양천구와 함께 ‘자전거 특별구’로도 지정된 송파구는 101.8km의 자전거도로와 4곳의 무료대여소도 확보했다. 지난해 2월부터는 자전거 무인 대여시스템인 ‘송파공용 자전거’(SPB)도 도입했다. 무선인식 기술을 이용한 이 시스템은 회원카드만 접촉하면 24시간 무인거치대에 비치된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다.
울산시도 시민들의 자전거 타기 열풍에 맞춰 올해부터 2021년까지 총 1345억 원을 들여 558km의 자전거 도로를 개설할 계획이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울산 전역이 자전거도로로 연결되고, 공단 근로자들도 자전거로 마음대로 출퇴근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여전히 못 미치는 자전거 인프라
울산 남구 여천동 명촌교 남쪽 태화강 둔치. 이곳에서 명촌교 인도까지 30여 m는 자전거도로가 연결되지 않는다. 매일 이곳을 통해 출퇴근하는 현대자동차 직원 최윤석 씨(51)는 “자전거도로가 연결돼 있지 않아 엄청나게 불편하다”고 말했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과 한국교통연구원이 2007년 5월 전국의 자전거도로 실태를 조사한 결과 자전거도로 대부분이 이처럼 연계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인도를 반으로 나눠 자전거도로를 형식적으로 설치해 사고 위험이 높고, 도로 중간의 전봇대와 가로수 때문에 자전거 주행을 방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하철과 버스터미널 등에는 자전거 주차장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대중교통과의 연계성도 많이 떨어진 것으로 파악됐다.
울산=정재락 기자 raks@donga.com
창원=강정훈 기자 manman@donga.com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