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천안논산 고속도로의 이인 휴게소에서다. 안내소를 찾은 60대 중반의 외국인 부부가 여직원에게 뭔가를 계속 묻고 있었다. 우려했던 대로 의사소통은 이뤄지지 않았고 당황한 여직원은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다. 그래서 도움주기를 자청했다.
이들은 ‘바바리안’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뮌헨이 속한 독일연방 가운데 하나인 바이에른 주민임을 말한다. 이들이 여직원에게 물은 것은 서울까지 거리였다. 3주간 한국을 돌아보는 중이라고 했는데 초행의 외국인이 설마 렌터카로 여행 중인 것은 아니겠지 하고 되물었다. 어디를 다녀오는 길인지를. 그랬더니 부산까지 차를 몰고 가서 일주일을 보낸 뒤 귀경중이라는 것이다. 대단한 모험심이었다.
작별인사를 나누고 차를 몰아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이런 생각에 미쳤다. 지금 내가 모는 이 차를 보여줄 걸. 낯선 곳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을 텐데. 그 차는 지붕을 닫으면 쿠페(4인승)로, 지붕을 열면 컨버터블이 되는 BMW 최초의 하드탑 컨버터블 모델 335i이었다. 아다시피 BMW(Bayerische Motoren Werke AG)의 이니셜 ‘B’는 ‘바이에른’에서 왔다. 뮌헨에 본사를 둔 BMW는 바이에른의 상징적인 기업이다.
봄은 노출의 시즌이다. 매화며 벚꽃이며 진달래 개나리 철쭉 목련 등 모든 봄꽃이 겨우 나무의 메마른 가지에서 저마다 꽃과 여린 잎을 노출시키는 장대한 소생 이벤트의 계절이다. 개구리가 그렇고 지리산 반달곰 역시 같다. 사람이라고 다를 까. 한동안 20도를 훌쩍 넘긴 여름 같은 봄날. 동아일보사가 있는 서울 한복판의 세종로 네거리는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노출패션의 젊은이들로 길고 지루했던 겨울의 때는 한순간에 벗겨졌다.》
자동차도 다르지 않다. 봄이 되자 뚜껑 열린 차들이 제철을 만난 듯 거리로 뛰쳐나왔다. 몇 주 전 주말. 대부도에서는 지붕을 열어젖힌 컨버터블 10여 대가 줄지어 모터케이드를 이루며 찬란한 봄날의 거리를 달렸다.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컨버터블의 지붕을 열고 목덜미를 간질이는 따사로운 봄볕을 느끼며 싱그러운 봄바람 맞으며 질주하는 즐거움을. 호사 중에서도 이만한 호사도 없을 듯하다.
봄이면 컨버터블 차량을 이용한 여행취재가 연중행사처럼 된 지도 벌써 서너 해. 그래서 평소 취재여행 길에 컨버터블 드라이빙 코스로 쓸 만한 곳을 눈여겨보아 왔다. 봄이면 동강할미꽃이 피는 정선 조양강과 평창, 영월의 동강 수변도로도 그런 곳 중 하나다. 기억할 것이다. 한 10십년쯤 전 동강댐 건설계획 발표 후 댐건설을 반대하는 환경운동에 때마침 불어 닥친 래프팅 붐이 가세해 동강 래프팅이 각광받았던 일이다.
내가 동강의 비경을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다. 래프팅 보트로 하류 영월까지 내려가면서 살펴본 동강의 모습. 그것은 비경 그 자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동강 변에는 길이 없었다. 발품 팔거나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한 이 구불구불한 사행천 양안의 뼝대(석회암 지형의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강변의 거대한 절벽)와 모래톱 자갈톱은 금단의 장소였다. 그런데 지금은 변했다. 동강 비경의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을 걷거나 혹은 자동차로 찾아가 감상할 수 있다. 강안에 도로가 가설되고 뼝대 위 가파른 고개(병방치)에 전망대가 설치된 덕분이다. 그 수변도로는 상류인 평창 쪽의 조양강, 그 조양강이 동남천과 만나 동강을 이루는 가수리부터 하류까지 10여 km 이어진다. 이 길은 독일 아우토반에서 고속질주에 제격인 BMW 335i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울퉁불퉁한 콘크리트 포장도로에다 굴곡이 심해 속도를 낼 수 없어서다. 하지만 지붕을 열고 봄기운을 만끽하며 높이 솟구친 강안의 뼝대 풍경을 감상하는 드라이빙에는 그만이다. 그래서 이 길로 차를 몰았다.
그 초입은 광하교(정선군 정선읍)다. 국도 42호선 비행기재 터널 아래서 만나는 광하리에 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상류인 아우라지에서 송천과 임계천이 만나 이룬 큰 물 조양강이다. 수변도로는 그 다리 아래로 가로지른다. 한참을 가다보면 노송 한 그루가 서 있는 마을 가수리에 닿는다. 이름(加水) 그대로 조양강에 동남천을 보태는 합수지점으로 예서부터 비로소 물은 동강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수변도로는 내내 동강의 강안을 따라 20여 분 이어진다.
길은 신동읍(정선군)에서 강을 등진다. 그러나 아쉬워하기에는 이르다. 차를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 달린다. 풍경은 반대 방향에서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광하교에 닿거들랑 국도 42호선으로 올라서 평창 방향으로 간다. 도중에 미탄을 지나는데 기화리에서 ‘문희마을’ 표지를 보고는 마을길로 진입한다. 10km가량 또 다른 동강 경치를 즐기며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문희마을은 동강비경을 감상하기에 기막힌 오지마을로 10년 전 동강 래프팅 취재 때 보트로 출발했던 곳이다.
당시만 해도 마을은 동강변 진탄나루에서 강안의 자갈을 밟고 1시간 이상 걸어가야 했다. 물론 지금은 포장도로가 놓였지만. 도로는 문희마을에서 끝난다. 마을 풍경은 이렇다. 강 건너로 뼝대가, 마을이 있는 산비탈 아래 강변으로 자갈톱이 펼쳐진다.
최근 펜션과 민박이 들어섰는데 가장 전망 좋은 곳은 동강산장이다. 1971년 정착한 터줏대감 정몽룡 씨 집으로 정 씨는 강 건너에 살며 40여 년 전 현몽한 도인의 안내로 백룡굴 입구를 발견한 정무룡 씨의 친형이다. 백룡굴은 석회암 동굴로 올 10월 공개를 앞두고 뼝대에 잔도(진입로) 설치 공사가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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