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예술가를 신성한 존재로 탈바꿈한 낭만주의 시대 이후 예술가들의 최고 ‘로망’이 됐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통해 부와 명성,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었고 다른 한 손엔 수많은 여성의 사랑을 움켜쥐었다.
서울연극제 개막작인 ‘피카소의 여인들’(극본 브라이언 매커베라·연출 폴 게링턴)은 피카소와 사랑에 빠졌던 4명의 여인의 시점에서 포착된 피카소를 퍼즐 조각으로 삼아 그 위대한 예술가의 벌거벗은 모습을 담았다. 그것은 마치 대상의 정면과 옆모습을 나란히 배치한 피카소의 유명한 입체파 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을 준다. 원래 이 작품은 8명의 독백으로 이뤄진 8편의 개별 공연이었다. 한국 공연은 피카소의 임종을 지킨 자클린 로크(김성녀), 가장 독립적이고 지적이었던 화가 마리테레즈 발터(배해선), 원조교제에 가까운 사랑을 나눴던 프랑수아즈 질로(이태린) 그리고 첫 부인 올가 코클로바(서이숙) 4명으로 압축해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가며 4명의 독백을 이어 붙였다.
그 퍼즐 조각들을 이어붙인 콜라주 속 피카소는 ‘나쁜 남자’다. 세계적 발레리나였던 올가와의 결혼은 그녀의 예술계 인맥을 노린 위선적 사랑의 산물이었고, 체조선수였던 프랑수아즈와의 사랑은 17세 젊은 육체에 대한 욕망의 분출이었다. 마리테레즈와 자클린은 피카소의 명성에 취해 불나비처럼 스스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마리테레즈는 그 사랑의 일방성에 눈을 뜨고 떠났지만 평생 그 저주를 껴안고 살아야 했고, 자클린은 피카소에게 철저히 굴종하면서 그의 그림 속 모델로 영생을 꿈꾸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작품 속에서 피카소의 사랑은 자신의 그림을 위한 물감에 지나지 않았다. 마리테레즈는 그 물감이 핏빛이라고 고발한다. 피카소가 우상화하면서 악처의 대명사가 된 올가는 이렇게 절규한다. “난 기미가 낀 계란 껍질이었어요, 노른자는 다 빠져버린.”
예술가는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항상 무언가를 파괴한다. 반 고흐와 잭슨 폴록은 스스로를 파괴했다. 로댕과 피카소 그리고 앤디 워홀은 타인의 삶을 파괴했다. 문제는 여성이 매력을 느끼는 남자는 늘 후자라는 점이다. 26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1544-1555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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