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풍금’ ‘소나기’ ‘빨래’ 순수한 감성 보여줘
‘…풍금’은 1960년대 시골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일곱 살 차이가 나는 총각선생님 동수와 늦깎이 초등생 홍연의 첫사랑을 그렸다. 이 작품은 1987년 발표된 하근찬의 소설 ‘여제자’를 원작으로 했고 드라마와 영화로 여러 차례 제작돼 익숙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 뮤지컬이 감동적인 것은 봄날 아지랑이처럼 나타난 사랑에 설레는 감정을 나비의 날개를 붙잡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동심(童心)과 아름답게 병치한 음악의 힘 때문이다.
극 초반 동수는 풍금을 치며 아이들과 함께 ‘나비 한 마리 내 어깨 위에/나비 한 마리 살며시 앉았네/가벼웁고 소리도 없어/앉은 줄 몰랐네’라며 동심을 노래한다. 이 노래는 마지막 무대에서 ‘나비 한 마리 스쳐간 자리/꽃이 피었네, 내 마음 깊은 곳/조그맣고 소리도 없어/봄이 온 줄 몰랐네’라는 2절과 함께 불리며 사랑의 노래로 탈바꿈한다. 극 중 애벌레(소녀)에서 나비(아가씨)로 탈바꿈하는 홍연이처럼.
여기에 연탄과 전봇대, TV 안테나, 신문지를 바른 벽지, 이승복 동상과 각종 반공구호 등 60년대 누추한 기억의 산물을 살구빛으로 물들여 아련한 추억으로 불러낸 무대는 곱디 고와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하나는 말로 표현하면 나비가 돼 날아갈까 봐 속만 태우던 한국적 풋사랑에 대한 추억이고 다른 하나는 국어교과서에서 ‘소나기’를 읽은 세대들이 홍역처럼 앓았던 80년대에 대한 추억이다. 전자는 주인공 동석이 서울에서 전학 온 소녀와 서로의 소원을 기원한 조약돌을 나눠 가지며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해/우리 함께 하는 이 순간/말하지 못한 네 마음 내 작은 가슴에 담아둘 거야’라고 노래하는 장면에서 시냇물로 흘러내린다. 후자는 운동권 대학생이 돼 경찰에 쫓기는 동석의 형이 환기시키는 애환과 ‘조용필 오빠’에 대한 여고생의 순정이 교차하며 그 시냇물에 놓인 징검다리가 된다.
무대 위에서 3t 분량의 물을 쏟아 부어 장관을 연출하는 소나기 장면은 순수했던 그 시절에 비해 때 묻고 탁한 현실을 말끔히 씻어내는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준다. 순수한 사랑의 상징으로 나비는 이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소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면과 성인이 된 동석이 소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살포시 등장한다. 이는 수백만 마리의 나비를 풀지만 정작 하룻밤 사랑에 목숨을 거는 중국 뮤지컬 ‘디에’와 대비를 이룬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구원하려는 두 작품과 달리 ‘빨래’는 한국사회가 잃어가는 순수함을 외국인 노동자의 해맑은 심성에서 길어 올린다. 5년 서울살이 동안 9번 직장을 옮기고, 6번 이사하고, 2번 남자에게 차인 나영은 세든 집 옥상에서 빨래를 널다가 옆집 옥탑방에 사는 몽골 청년 솔롱고를 만난다. 솔롱고는 욕설과 반말을 들으며 한국어를 배웠고, 몇 달치 월급을 떼이기 일쑤고 아파도 병원도 못 가는 불법노동자 신세지만 ‘무지개의 나라’ 솔롱고스(한국)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나영과 솔롱고는 순수한 눈망울을 비누방울 삼아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주름진 내일을 다려요’라고 노래한다. 관객들은 누추하고 혼탁한 일상을 깨끗이 빨아 맑은 햇살에 너는 듯한 개운함을 맛볼 수 있다. 소극장 무대를 벗어나 중극장에 서는 이번 작품에서는 16년 만에 뮤지컬 무대로 돌아온 가수 임창정과 ‘지킬 앤 하이드’로 스타덤에 오른 홍광호가 솔롱고 역을 맡아 기대를 모은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