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이 완전한 내 사람인 줄 알았는데, 흔히 말하듯이 남편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영혼 구석구석의 모든 비밀까지 내 것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전혀 내 사람이 아니라 철저하게 비밀을 간직한 낯선 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
계급 다른 세 남녀의 헌신과 배신
헝가리 출신 소설가 산도르 마라이의 이 장편소설은 세 남녀간의 얽힌 관계를 통해 결혼이 갖는 의미와 삶의 본질을 묻는 작품이다. 소설은 일릉카, 페터, 유디트 등 세 명의 주인공이 차례로 각자의 시각에서 겪은 결혼생활과 위기, 파국적 결말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의 회상과 고백을 통해 결혼을 둘러싼 열정적인 사랑, 용기 없는 사랑, 파괴적인 사랑의 실체를 한번에 살펴볼 수 있다.
일릉카는 현실적이고 현숙한 아내로 집안 사업을 물려받은 부유한 남자 페터와 결혼한다. 그녀는 결혼생활을 행복하고 단란하게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뿐 아니라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비밀과 우수가 드리워진 듯한 페터는 그녀로선 납득할 수 없는 말을 한다. 자신은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사랑받을 필요도 없는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결혼을 했느냐는 일릉카의 반발에 대한 해명은 이런 식이다.
“우리 함께 살기는 하지만, 제발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목숨을 걸지는 맙시다…당신하고 결혼했을 때,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걸 알고 있었소. 그런데 당신에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했소. 당신이 나를 이렇듯 사랑할 줄 몰랐기 때문에 결혼한거요.”
이보다 더 잘못된 결혼이 세상에 있을까 절망하는 일릉카에게 시어머니는 “그것도 그저 하나의 결혼일 뿐이며 다른 것을 원하는 사람은 허황된 몽상가들일 뿐”이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릉카는 남편의 지갑 속에서 다른 여자의 소지품을 발견하면서 이제까지의 의문을 풀게 된다. 그에겐 오래전부터 다른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페터의 마음 깊이 자리한 그녀는 그의 집에서 하녀로 일했던 유디트. 부유하고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안정된 삶이 주는 권태에 지쳐 있던 페터에게 유디트는 자신의 삶에서 오래도록 결핍돼 있던 열정의 대상이다.
페터는 유디트가 오래도록 자신을 흠모하고,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리길 기다려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릉카와 이혼하고 유디트와 재혼한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나 하녀로 주인의 시중을 들며 살아온 유디트가 결코 누릴 수 없었던 물질적인 풍요를 안겨준다. 수표를 마음껏 쓰도록 하고, 온갖 허황된 물건들과 사치스러운 장식품들을 사들이는 것을 그저 묵인한다. 하지만 그는 유디트가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단지 주인의 눈치를 보며 시중을 들어줬던 그때 방식으로 자신의 기분을 맞춰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의 그런 태도는 두 사람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계급적 차이이기도 하다. 그는 유디트가 다른 남자와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나이가 든 유디트는 로마의 한 호텔에서 동거 중인 애인에게 과거를 이야기해준다. 가난한 어린 시절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마치 계급투쟁을 하듯이 주인집의 사내와 결혼한 그녀는 결혼이 한순간도 기쁘거나 편안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이 여인은 결혼 이후의 생활을 위해 남편의 돈을 빼돌려 모으면서 살 길을 찾는다. 이 세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둘러싼 헌신과 배신, 사회적 계급 문제를 통해 작가는 결혼이란 판타지를 되짚어보게 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