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개봉하는 영화 ‘김씨표류기’(시나리오·감독 이해준)는 강 위에 떠있는 밤섬을 배경으로 한 ‘서울판 로빈슨 크루소’다. 고립된 상황의 한 남자가 무인도에서 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뻔한 얼개는 서울 안에 있지만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것으로 설정한 밤섬이라는 공간과 접목되며 신선하게 탈바꿈한다.
자살 실패로 하루아침에 무인도에 떨어진 남자 김 씨(정재영)는 밤섬 곳곳에 심어진 버섯과 사루비아 등을 먹으며 연명한다. 무의미한 줄만 알았던 그의 삶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밤섬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통해 조금씩 의미를 되찾아간다. 함께 밤섬에 ‘표류’한 오리배를 통해 생각보다 일찍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고 자신의 양복을 입힌 허수아비는 든든한 친구가 된다.
무엇보다 관객들의 웃음이 터지는 장면은 바로 자장면 에피소드. 모래사장에서 ‘짜파게티 스프’를 주운 김 씨는 자장면을 손으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새똥에서 추출한 씨앗으로 밭을 일군다. 거기서 자란 옥수수로 자장면 면발을 만든 그가 비장하게 말하는 장면(“내게 자장면은 희망이야”)에서는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터진다.
남자 김 씨로도 충분히 재밌는 영화는 또 한 명의 김 씨를 보탰다. 바로 여자 김 씨(정려원)다. 망원렌즈로 달을 찍는 것이 유일한 취미요, 3년째 문 밖으로 나가본 적 없이 오직 인터넷으로만 세상과 소통하는 은둔형 외톨이다.
망원렌즈로 창밖을 관찰하던 여자 김 씨는 우연히 강 건너에 표류한 김 씨를 포착하게 된다. 여자 김 씨는 와인 병에 쪽지를 적어넣어 강물에 띄우고 남자 김 씨는 밤섬 모래사장에 나무 막대기로 할 말을 써내려간다. 전반 내내 남자 김 씨의 고군분투를 그린 영화는 후반부터 양(兩) 김 씨의 소통에 초점을 맞춰가며 로맨스로 흐른다.
그리고 아쉽지만 영화도 이때부터 조금씩 표류하기 시작한다. 볼 살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살을 잔뜩 뺀 정려원의 엉뚱한 듯 어두운 에너지는 정재영의 유쾌한 에너지와 좀처럼 맞물리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는 남자 김 씨의 이야기만으로 최근 개봉작 중 드물게 충분히 웃기고 감동적이다.
세상에서 소외당한 별난 남녀의 소통과 사랑을 그렸다는 점에서 최근 개봉했던 영화 ‘우리 집에 왜 왔니’가 떠오른다. 하지만 ‘우리 집…’이 미스터리 멜로라는 이종장르의 혼합이라면 ‘김씨표류기’는 휴먼 드라마로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치솟는 자살률, 악의성 댓글로 가득한 인터넷 등 시의적절한 소재를 버무린 것도 공감 지수를 높이는 요소다. 무엇보다 영화는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한 채 자신만의 고립된 섬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숨통을 틔워주는, 오아시스 같은 영화다.
데뷔작 ‘천하장사 마돈나’로 여자가 되고 싶은 씨름선수 오동구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려낸 이해준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12세 이상 관람 가.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