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2년 5월 스티븐 벨롯은 장인 크리스토퍼 마운트조이를 상대로 지참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며 소송을 제기한다. 셰익스피어는 이 소송의 진술인 가운데 한 명으로 진술서를 썼다. 벨롯 대 마운트조이 사건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진술서는 1909년 발견됐지만 셰익스피어 전기의 자료로 사용된 적이 거의 없었다. ‘실버 스트리트의 하숙인 셰익스피어’는 이 진술서에서 출발해 셰익스피어의 삶을 추적한다.
이 진술서에서 셰익스피어는 벨롯과 알고 지낸 지 10여 년이 됐다고 말한다. 다른 증인은 벨롯 부부가 ‘셰익스피어 앞에서 결혼에 동의했다’고 진술한다. 셰익스피어는 벨롯 부부가 결혼한 1604년을 전후해 1∼2년간 마운트조이의 집에서 거주했다는 뜻이다.
이 시기는 셰익스피어에게 전환기였다. 당시 셰익스피어는 40세였고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 ‘리처드 3세’ ‘한여름 밤의 꿈’ 등 걸작을 창작하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1603년에는 셰익스피어의 극단이 ‘국왕 소속 극단’으로 공인받는다. 이 시기에 극장 가까이에서만 살았던 셰익스피어는 극장과 멀리 떨어진 실버 스트리트로 거처를 옮긴다.
마운트조이는 프랑스 출신으로 여성용 머리장식을 만드는 세공사였다. 외국인과 사는 것은 당시 흔치 않은 일이었다. 머리장식은 최신 유행을 반영하는 패션 소품이었다. 저자는 셰익스피어가 마운트조이의 집에 살면서 이민자들의 이국적인 분위기와 런던의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공방을 관찰하며 작품 창작을 위한 영감을 얻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는 당시 머리장식에 관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엉클어진 근심의 명주실을 짜 주는 잠”(맥베스 2막 2장), “그대의 하찮은 풀솜 타래, 그대의 쓰린 눈을 위한 녹색 사스넷…”(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5막 1장) 등이 그렇다. 셰익스피어는 벨롯 부부의 결혼을 희곡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셰익스피어는 마운트조이의 부인인 마리의 부탁을 받고 벨롯이 결혼을 결심하도록 설득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결혼하도록 설득당하는 프랑스 젊은이가 등장한다. 이 프랑스 젊은이를 벨롯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저자는 셰익스피어가 살던 환경이 희곡에 반영됐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이해하고자 한다.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삶이 작품 속 등장인물들과 작품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는지를, 벨롯 대 마운트조이 사건이라는 작은 계기를 통해 밝히고 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