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석 씨(47)가 배우 인생 20여 년 만에 첫 전라 연기로 연극 무대에 선다.
서울연극제 30주년 기념공연작 9편 중 1편으로 선정돼 18∼22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 오르는 연극 ‘길 떠나는 가족’(김의경 작, 임형택 연출)에서다.》
화가 이중섭의 삶과 예술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1991년 서울연극제에서 작품상과 희곡상, 연기상을 휩쓸었다.
당시 이중섭 역을 맡은 김갑수 씨의 신들린 듯한 연기는 연극배우들에겐 ‘전설’로 통한다.
연극보다 TV와 영화로 친숙한 정보석 씨가 그런 부담스러운 배역에 도전하는 것도 모자라 전라 연기까지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1991년 작품을 본 동료들이 그러더군요. ‘야, 그때 김갑수 선배 연기가 얼마나 죽여줬는데.’ 그래 제가 웃으면서 그랬죠. 그때 죽여놨던 사람들 이번엔 다 살려놓겠다고.”
공연을 앞두고 밤새워 막판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그를 12일 만났다. 의외로 여유가 넘치는 그는 제작진도 쉬쉬하는 노출 장면을 시원하게 털어놨다.
“극 막판에 이중섭이 광기에 사로잡혀 성기를 소금으로 씻어내는 장면이죠. 실제 그의 작품에서 성기는 생명의 근원으로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세간에선 이를 춘화로 치부하거든요. 그 장면은 그런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키는 절망적 행위이면서 자신의 예술을 부패시키지 않고 지켜내면 언젠가 빛을 보리라는 희망을 함께 전달한다는 점에서 꼭 필요한 장면이라 생각했습니다.”
1991년에는 문제의 장면에서 김갑수 씨가 하의를 벗고 무대에 올랐지만 바가지로 가린 채 연기를 했다고 당시 연출가 이윤택 씨가 전했다. 영화계에선 ‘박쥐’에서 송강호 씨의 성기 노출이 화제가 됐지만 연극에선 그 금기가 깨진 지 오래다. LG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페르 귄트’의 주연배우 정해균 씨도 마지막 장면에서 전라 연기를 펼친다. 그래도 여전히 쉽지 않은 노출 연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은 정보석 씨가 그만큼 이중섭에게 꽂혔기 때문이다.
“2004∼2005년 EBS 문화사시리즈에서 해설을 맡았는데 그때 이중섭의 삶을 그린 60분짜리 드라마를 보고 언젠가 꼭 그를 연기해 보고 싶었어요. ‘길 떠나는 가족’ 제작진의 연락을 받고 제가 먼저 몸이 달았죠.”
연극 ‘아트’와 ‘클로저’ 등에 꾸준히 출연했다지만 대극장 공연은 1993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시저 역 이후 16년 만이다. 조금은 무모해 보이는 도전이지만 날쌘 제비 같은 외모와 달리 그는 한 번 꽂히면 앞뒤 안 재는 우직한 돌쇠 형이다.
그는 고교시절 시속 143km를 뿌리던 강속구 투수였다가 무리한 훈련으로 허리 부상을 당해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이후 하루 30분밖에 안 자면서 공부에 전념해 2년 만에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지금은 시속 126km의 공으로 타자들을 압도하는 연예인야구단 ‘조마조마’의 에이스다.
그가 연극영화과를 택한 이유는 좀 의외다. 순전히 금박 외장에 빨간색 띠지를 입힌 겉모양이 멋있어 산 정음사판 셰익스피어 전집 때문이었다고 한다.
“야구 문제로 방황하며 가출할 때도 다른 것은 다 버리고 그 책만 들고 다녔는데 읽을 순 없었어요. 운동만 하던 친구에겐 너무 어려웠으니까요. 게다가 그 전집의 첫 작품이 하필이면 ‘티투스 안드로니쿠스’라고 가장 알려지지 않은 역사물이었어요. 간신히 그 작품을 다 읽고나니까 연기가 너무 하고 싶어졌어요.”
이후 여러 차례 통독한 그 전집을 아직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는 그는 분명 타고난 연기자는 아닐지언정 집념의 연기자임은 틀림없다. 그는 이번 작품을 위해 이중섭 관련 자료를 섭렵한 것도 모자라 그의 그림까지 하나하나 모사하고 있었다.
“얼마 전 깨달은 건데 배우가 너무 생각이 많아서도 안 되겠더라고요. 사전 준비는 철저히 하되 연기에 임할 때는 그냥 내 속에 준비된 것들이 자연스럽게 배어나도록 해야지 이리저리 머리 굴려봐야 관객만 힘들어요.”
2만∼3만5000원. 02-923-1810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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