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삶…. 여기서는 그게 전부잖아.”
영화의 첫 장면. 익숙한 섹스를 사무 보듯 마치고 나서 아내가 남편에게 서글픈 얼굴로 말한다. 그들은 몰랐다.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는 30분 뒤에 그 푸석한 섹스의 온기를 깨닫게 되리라는 것을.
14일 개봉한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연극무대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영화다. 꼼꼼한 장기 리허설로 유명한 시드니 루멧 감독다운 연출. 이 85세 노익장은 ‘에쿠우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형사 서피코’ ‘허공에의 질주’ 등에서 늘 시계톱니처럼 매끈하게 착착 맞물려 돌아가는 이야기를 선보여 왔다.
부동산 회계사인 형 앤디(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와 배관공인 동생 행크(에단 호크)는 모두 돈에 쪼들린 신세다. 궁리 끝에 부모의 보석상을 털기로 한 막돼먹은 이 형제. “보험 보상이 충분할 테니 부모에게 별 피해가 없을 것”이라 변명하며 강도짓을 저지른다. 하지만 간단할 듯했던 범행은 뜻밖의 사고를 부르고, 가족 모두가 쓰라린 파멸로 치닫는다.
앤디에게는 흉금을 털어놓을 대상이 없다. 아내는 주말의 섹스파트너. 울화가 터질 때 위안을 주는 것은 사무실 캐비닛 안의 코카인 봉지뿐이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고급 마약카페 게이 마담이 유일한 말벗이다.
“부동산 회계란 게… 어떻게 셈을 해도 정확한 답이 나오는 일이야. 조각을 이어 붙이면 하나의 덩어리가 나오듯이 깔끔하게 맞아떨어져. 그런데 내 인생은 그렇지가 않아. 아무리 더해 붙이려 해도 연결이 안 돼. 제대로 되는 게 없어.”
마약상은 들은 척 만 척이다. “결혼을 하거나 정신병원 상담을 받아 봐요.” 계산 끝낸 손님의 다음 방문을 생각해 억지로 내놓는 심드렁한 립 서비스. ‘너절한 신세타령 들어줄 서비스는 요금에 포함하지 않았으니 닥치고 썩 꺼지라’는 재촉 인사다.
이야기는 조각퍼즐 맞추듯 여러 시점을 오가며 채워진다. 영화 초반의 강도 사건을 중심으로 ‘범행 하루 전 앤디’ ‘범행 30분 뒤 행크’ 등 소제목을 붙여가며 한 장(章)씩 살을 붙여나간다. 그 합(合)은 망가지고 곪아터진 한 가족의 흉측한 속사정이다.
행크는 매주 목요일 형의 침대 위에서 형수와 섹스를 즐긴다. 초등학생 딸로부터 “돈도 못 버는 주제에 딸 망신이나 준다”는 소릴 듣고도 대꾸 한마디 못한다. 이혼한 아내는 뒤에서 차갑게 웃음 짓는다. 앤디가 자식의 유치원 공연에서 치는 박수는 ‘나는 멀쩡한 사람’이라고 떠벌리기 위한 몸부림이다.
영화 후반. 형제의 아버지는 아내가 죽고 나서야 무심했던 아들 앤디에게 처음으로 따뜻한 말을 한마디 건넨다. 그에 대한 아들의 반응은 감동이 아닌 분노다. 가족에게 건네는 사과의 무게는 시간이 갈수록 감당할 수 없이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루멧 감독은 오프닝 크레디트 제목 앞에 ‘30분 전의 천국’이라는 어구를 물렸다. 일상의 천국을 깨닫는 것은 언제나 그것을 잃고 난 다음이다. 퍽퍽한 섹스는 앤디가 가졌던 유일한 인간적 관계였다. 형제는 각자 “탈출과 새 출발”을 꿈꿨지만, 그들은 30분 전에 이미 과분한 천국에 있었다. 18세 이상 관람가.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