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삼형제 하느님께 완전히 졌습니다”

  • 입력 2009년 5월 15일 02시 56분


사제의 길을 걷고 있는 허영민 허영엽 허근 3형제 신부(왼쪽부터). 이들은 “사제품을 받을 때 그 떨림과 감격이 생생하다”며 “지금도 매일 부족한 부분을 채워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사제의 길을 걷고 있는 허영민 허영엽 허근 3형제 신부(왼쪽부터). 이들은 “사제품을 받을 때 그 떨림과 감격이 생생하다”며 “지금도 매일 부족한 부분을 채워달라고 기도한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은경축-책출간 기념위해 한자리

허 근-영엽-영민 세 신부

천주교 서울대교구 단중독 사목위원장인 허근 신부(55), 문화홍보국장인 허영엽 신부(49), 의정부교구 덕소성당 공동사목 제1지구장인 허영민 신부(45).

이들은 의정부교구가 분리되기 전 서울대교구에서 널리 알려진 3형제 신부였다. 지금은 각각 다른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14일 오후 오랜만에 서울 명동성당에서 만났다. 둘째 허영엽 신부의 사제 수품 25주년을 기념하는 은경축 미사와 에세이집 ‘신부님, 손수건 한 장 주실래요?’의 출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하느님! 저는 도망가려고 많이 발버둥쳤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저는 졌습니다. 하느님께 완전히 졌습니다.”

둘째 허 신부는 지금도 막내 신부의 첫 미사 강론을 생생히 기억한다. 1981년 신학교에 입학한 막내는 두 형과 달리 여러 차례 자퇴하려고 했고 사제의 길을 포기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내 신부는 ‘형님들 따라 강남 간 거지’라면서도 잘나고 바쁜 형님들 때문에 장남 같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5남매 중 아들이 세 명이나 있는데 나마저 신부가 되면 어머니를 자유롭게 모실 수 없게 됩니다. 게다가 둘째형은 독일 유학 중이었고, 큰형님은 술에 심취해 날로 ‘고수’가 되시니….(웃음) 그래서 하느님을 피해 도망 다녔지만 어쩔 수 없더군요.”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홀로 17년 동안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던 어머니는 2002년 아침 기도를 마친 후 잠이 든 것처럼 세상을 등졌다. 친가로 7대, 외가로는 6대째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지만 부친은 장남에 이어 둘째가 사제가 되는 것은 반대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불호령에 흔들리던 둘째를 부엌으로 불러 ‘네가 원하는 길을 가라’고 했다.

하늘나라 가신 어머니 신심이 사제의 길 걷게 하는 원천

비서실장으로 장례위원으로 故 金추기경과 인연도 각별

세 형제 신앙의 원천이었던 어머니는 형제의 이름을 부르다가도 아들이 사제품을 받으면 곧 신부님으로 호칭을 바꿀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그래서 세 형제는 차례로 ‘형님 신부’ ‘작은 신부’ ‘막내 신부’가 됐다.

“빈소를 지키는데 평소 무릎이 아팠던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더군요. ‘작은 신부님, 걱정하지 말아요. 내 다리는 이제 다 나았어요. 쑤시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아요.’”(허영엽 신부)

“어머니가 내 걱정 말고 좋은 신부 되라고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것 같아요. 작은형이랑 허근 신부님이 술을 끊어 걱정거리가 없어져 일찍 돌아가신 것 아니냐는 농담을 했죠.(웃음)”(허영민 신부)

다른 일정 때문에 뒤늦게 온 형님 신부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술에 빠져 있을 때 어머니는 매일 오전 5시 성당으로 전화했어요. 아침 미사를 빠뜨릴까 걱정한거죠.”(허근 신부)

한때 두 동생이 술 얘기를 꺼내면 형은 무릎을 꿇고 그냥 울었다. 하지만 저녁 시간이면 다시 술에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주(酒)를 주님으로 모셨다’고 고백할 정도로 심각한 알코올 의존자였던 형님 신부는 술을 끊은 뒤 1999년부터 알코올 의존증과 관련한 사목활동을 시작한다.

허근 신부는 “어떨 때는 내가 알코올 의존자가 된 것도 하느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수치스럽지만 그 경험을 통해 의존자들과 교감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세 신부는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신학생 시절 비서실장인 형님 신부를 통해 추기경을 처음 만났다는 허영엽 신부는 추기경 장례미사 홍보위원장으로 선종 소식을 처음 알리게 됐다.

“내일이면 부제품을 받는데 추기경이 갑자기 ‘자네는 지금 나가도 돼’라는 겁니다. 웃으며 하는 말이었지만 아들이 둘이나 사제가 됐으니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도 있지 않으냐는 의미였습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단 1mm라도 나아진 신부가 되고 싶습니다.”(막내 신부)

“사제 서품식에서 제대 앞에 부복해 착한 사제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근데 성경에서 착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하더군요. 겁이 나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 달라고 기도합니다.”(작은 신부)

“(추기경을 모시고) 81년 여름 경남 산청 부근을 지나는데 냇가 쪽 방향이라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목적지인 한센인촌에서 환우들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던 추기경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사제가 되는 것은 쉽지만 사제로 죽기는 어렵다는 말이 떠오릅니다.”(형님 신부)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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