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도안신도시 파렌하이트
주부 2200명 설계 때부터 참여
‘거실의 대리석 아트월을 빼고 남는 돈으로 아이들 방에 붙박이장을 달아 달라’ ‘아이들이 마음껏 낙서할 수 있도록 한쪽 벽에 아예 화이트보드를 설치하면 어떨까’ ‘화장대 자리에는 어둡고 그늘이 지는 천장 조명 대신 얼굴에 직접 쏘아주는 분장실용 조명으로 하면 좋겠다’….
설계 단계에서 최종 시공까지 여자 디자이너와 주부를 전폭적으로 참여시킨 아파트가 최근 등장했다. 아파트에 가장 오래 머물고 아파트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주부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2, 3년 전부터 건설사들이 10∼50명 주부 자문단을 뽑아 모델하우스 완공 후 품평을 받는 경우는 있었지만 2200명의 주부가 최초 설계 단계에서부터 모델하우스 완공까지 2년간 200회 넘게 모여 함께 아파트를 개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6일 대전 유성구 봉명동 충남대 인근의 ‘대전 도안신도시 파렌하이트’ 모델하우스에서는 주부 매니저 100여 명의 최종 점검이 한창이었다. 모델하우스 오픈은 아직 열흘 남짓 남았지만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주부도 적지 않았다. 이 모델하우스가 이렇게 화제가 된 것은 주부들이 직접 만든 아파트란 소문이 나면서다.
설계부터 파격적이다. 방과 방 사이, 방과 거실 사이 모든 벽이 가변형이다. 추가 비용 없이 가족 수에 따라 방을 3개로 쓸 수도 있고 방을 1개나 2개로 줄이고 거실을 넓게 쓸 수도 있다.
요즘 분양하는 아파트에 으레 들어가 있는 식기세척기나 부피만 크게 차지하는 전기오븐 등을 빼거나 최소화하고 수납공간을 최대로 늘린 것도 특징. 욕실 세면대 아래의 ‘청소용품 수납망’, 화장대의 ‘유리로 된 액세서리 수납 서랍’과 ‘드라이어와 긴 화장품을 넣을 수 있는 깊은 서랍’이 그것이다.
남자 설계자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요소들이 새로 생겨나기도 했다. 보조 주방은 김장을 담그거나 헌 냉장고를 가져다 놓기 편하도록 넓게 설계됐다. 욕실에 설치된 전자시계와 아이들 키를 잴 수 있는 눈금타일, 손님이 갑자기 왔을 때나 요리를 하다가 화장 상태 등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주방 수납장 속 거울, 주방 옆에서 공과금을 계산하거나 가계부를 쓸 수 있는 주방용 간이 데스크 등은 모두 주부들의 요구로 생겨났다.
주부들의 까다로운 지적으로 벽지를 뜯어내거나 시공을 처음부터 다시 한 것도 여러 번이다. 현관 신발장을 열면 나오는 ‘슬리퍼꽂이대’는 허리를 굽히지 않고도 발로 ‘척척’ 걸 수 있는 높이에 있어야 한다는 요구로 높이가 재조정됐다. ㄷ자형 주방은 폭이 좁아 불편하다는 지적 때문에 이미 승인까지 받은 설계 도면을 재승인받아 폭을 넓혔다. 현관 턱과 주방 모서리 등은 아이들이 다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와 모두 둥글게 깎아냈다. 이처럼 주부들의 의사를 반영해 설계를 바꾼 항목만 50개가 넘는다.
주부 김정아 씨(37·대전 서구 둔산동)는 “기존 주택들은 실제 필요와 상관없이 시공부터 해 놓고 ‘아파트를 살지, 말지’만 묻는 방식이었는데 처음부터 우리 의사가 반영돼 꼭 필요한 것이 알맞은 공간에 배치돼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 “주부의 마음을 잡아라”
이처럼 주부 ‘프로슈머(Prosumer·참여형 소비자)’의 역할이 중요해지자 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건설회사가 늘고 있다. 같은 소비자 처지여서 이들의 입을 타고 전해지는 마케팅 효과가 탁월한 데다 자신이 직접 설계에 참여한 만큼 애착을 갖고 직접 청약에 나서는 사례도 많기 때문.
GS건설은 자사 브랜드인 ‘자이’가 아닌 타 브랜드 아파트에 거주하는 주부들로만 구성된 주부 자문단을 위촉해 활동비로 월 80만 원씩을 주고 자이 아파트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대우건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푸르지오 리더스클럽’을 운영하며 아파트 실내외의 각종 마감과 디자인에 대한 모니터를 받고 있다. 피데스개발의 김희정 연구센터 소장은 “수요가 많아 줄서서 아파트를 청약하는 시대가 아닌 만큼 공동주택인 아파트도 단독주택 못지않게 주택 수요자 한 명 한 명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대전=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