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돌파가 어려울 땐 차선 차차선을 택하라. 지름길을 포기하고 택한 길이 가장 빠를 때도 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노윤상 앵거 클리닉에 근무하는 단 한 사람의 실력 있는 간호사시죠. 다섯 명의 간호사가 로봇으로 대체된 10년 동안 꿋꿋하게 병원을 지키셨더군요."
석범이 슬쩍 띄워주자, 미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실력은 아니고요, 운이 좋았죠."
"그 운을 저희에게도 조금 떼어줄 수 없습니까?"
"무, 무슨 말씀이신지……?"
석범은 지금 달리는 자동차의 최종목적지와 미미로부터 받고 싶은 협조사항을 이야기했다. 미미는 잠시 망설였지만 삼족오를 보며 결심을 굳혔다. 보안청을 위한 일이 곧 특별시를 위한 일이라고 앨리스가 떠벌리는 사이 자동차가 멈췄다.
석범과 앨리스 그리고 미미가 차에서 내렸다.
"따라오세요."
결심을 굳힌 듯 미미가 두 사람 사이로 종종걸음을 쳤다. 어둠이 짙었지만 제 집 안마당 드나들듯 망설임이 없었다. 미미의 나이 열아홉부터 스물아홉까지 10년을 꼬박 다닌 곳, 쿼런틴 게이트였다.
정문 앞에 도착한 미미는 오른 팔목을 들어 하트 모양 금속판에 갖다 댔다. 덜컹, 문이 열렸고, 현관으로 안내 로봇이 걸어 나왔다. 앨리스는 잔뜩 긴장한 채 총을 뽑아 들었다. 병원에 배치된 간호용 로봇은 방법용 로봇을 겸했다. 낯선 침입자로 판단하면 주저 없이 살상용 무기를 쓸 것이다. 미미가 팔을 들어 앨리스를 막았다. 그리고 천천히 로봇을 향해 똑바로 걸어간 후 포옹했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연인이 재회라도 하는 분위기였다. 미미가 포옹한 채 로봇의 엉덩이를 가볍게 툭툭 치자, 안내 로봇은 다시 뇌파 검사실 앞 제자리로 돌아갔다.
"가시죠."
미미가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어떻게 한 겁니까? 둘이 정말 사귀는 건가……?"
따라가며 앨리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스미스는 제 취향이 아니에요. 전 오직 부엉이뿐이랍니다."
미미는 '일편단심'을 강조했고, 앨리스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으며, 은석범은 '취향'이란 두 글자를 음미했다. 인간에 대한 호감이 제각각이듯 로봇에 대한 호감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로봇에게만 성욕이 솟는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태어날 때부터 동성애적인 욕망을 지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로봇과의 사랑도 정녕 어찌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치료나 교화를 통해 충분히 되돌릴 수 있는 것일까.
미미가 복도 끝 작은 방문에 손목을 댔다. 문이 열렸다.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말고 미미가 석범에게 확약을 받듯 말했다.
"부엉이와 29일 동안 지내도록 해준다는 약속 잊지 마세요. 또 새 직장을 찾아준다는 것도. 여기서부턴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습니다. 두 분은 밖에 계세요. 관련 자료는 제가 찾을 게요."
"그래도 혼자 들어가는 건……."
앨리스가 끼어들자, 미미는 석범을 보며 강조했다.
"안됩니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명령을 내리거나 이상 행동을 하면 비상 상황으로 전환되고 자료 전체가 영영 지워집니다. 이름만 확인할 게요. 시정희, 변주민 그리고 방문종, 맞죠?"
"맞습니다."
미미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석범은 벽에 등을 댄 채 기댔고 앨리스는 미미가 사라진 문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앙상블>에서 이곳까지 바짝 긴장한 채 왔는데, 갑자기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저 로보홀릭을 믿을 수 있을까요?"
앨리스가 물었다.
"믿지 않음? 로보홀릭은 마약중독자보다도 열 배는 더 집착이 심해. 부엉이와의 행복한 29일을 위해 이 정도 수고쯤은 아무 것도 아니지. 이제 최미미는 앵거 클리닉에서 일 못해. 노윤상 원장과의 의리를 지켜 얻는 이익이 전혀 없단 소리지."
"세 사람의 공통점을 못 찾으면 어찌 합니까?"
"그럼…… 직접 가야겠지."
"노윤상 원장은 현재 집에서 어린 동거녀와 체스를 두고 있다는군요. 오늘밤에 특별히 움직일 것 같진 않습니다."
석범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앨리스가 석범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꺼냈다.
"미미가 뭘 찾아내든지, 우선 노원장을 용의자로 체포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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