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전 결승서 패하고 방황 여자친구 도움 슬럼프 탈출
1인자 자리 올라서려면 나만의 ‘이기는 법’ 있어야
바둑은 평생 함께할 벗 더 보여줄게 없을때 은퇴”
“응씨배 우승의 가장 큰 소득은 자신감입니다. 그동안의 슬럼프를 떨어내면서 제 바둑 인생에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지난달 말 제6회 응씨배에서 이창호 9단을 3승 1패로 꺾고 우승한 최철한 9단(24)을 최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만났다. 그는 “인터뷰가 많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안 들어와 할 얘기가 많다”며 농담을 던졌다. 응씨배 우승으로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 5회 응씨배 vs 6회 응씨배
우승상금 40만 달러인 응씨배는 최 9단에게 무덤이자 부활의 장이었다. 최 9단은 2005년 5회 응씨배 결승에서 창하오 9단에게 1승 3패로 졌다. 결승 직전 국수전에서 이창호 9단을 3-0 스트레이트로 꺾어 자신감 100%로 출전했기에 충격이 더 컸다. 한때 1위였던 국내 랭킹도 10위권 밖으로 떨어졌다. 우승은커녕 세계대회에선 단칼 멤버(1회전 탈락)인 경우가 많았다. 기풍도 바꿔보고 공부도 열심히 해봤다. 하지만 페이스가 쉽게 올라가지 않았다.
“무덤에 누워있는 기분이랄까요. 뭘 해보려고 발버둥치는데 뜻대로 안 되니까 정말 답답했어요.”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과거의 영광이나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다시 ‘나만의 바둑을 두자’고 마음먹었다. 2008년 서서히 성적을 냈다. 슬럼프 탈출엔 1년 반 전부터 사귄 여자 친구가 도움이 됐다. “방황하고 있을 때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됐어요. 바둑계 사람이고요.” 인적사항을 더 캐내려고 하자 “여기까지만” 하고 말문을 닫았다. 결혼은? 이창호 9단이 가고 난 뒤에 생각해 보겠다며 웃었다.
6회 응씨배는 최 9단에게 부활의 땅이었다. 16강전에서 중국의 1인자 구리 9단의 거대한 대마를 잡고 이긴 것이 밑거름이 됐다. “이번에 우승 못하면 자포자기할 것 같았어요. 우승을 못하면 평범한 기사로 남을 것 같았죠.”
4강전. 중국의 류싱 7단은 호언장담했다. “최 9단의 기보를 연구했는데 (슬럼프 때와) 달라진 게 없다”며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최 9단의 마음가짐과 집중력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기보는 껍데기일 뿐이죠. 상대의 숨결과 손동작을 느끼며 직접 둬보지 않으면 상대가 왜 그 수를 뒀는지, 약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요. 기보로는 자기보다 약한 상대처럼 보여도 직접 마주한 경험이 없으면 승률은 반반으로 봐야 합니다.” 최 9단은 껍데기를 보고 자신하던 류 7단을 2-0으로 누르고 우승까지 이뤘다.
○ 이창호 vs 이세돌 vs 최철한
응씨배에서 최 9단의 제물인 된 이창호 9단은 최 9단에게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전체 전적은 23승 22패(최 9단 기준)로 호각이지만 타이틀전에선 응씨배까지 6번을 만나 5승 1패로 최 9단이 앞서고 있다.
“바둑은 상대적이에요. 상대 전적에서 밀리면 압박감이 생기고 그걸 제어하기가 쉽지 않아요. 이창호 9단이 저한테 그런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아요.”
묘하게도 이세돌 9단은 이창호 9단에게 성적이 나쁘다. 이번 응씨배 준결승에서도 0-2로 졌다. 그러나 최 9단은 이세돌 9단에게 약하다. 이창호 이세돌 9단처럼 1인자로 올라서기 위해 최 9단이 무엇을 더 보완해야 하는지 묻자 금세 “이기는 법”이라고 말했다.
“두 기사 모두 승부처에서 냉정하죠. 바둑을 정리해야 할 시점이 오면 이세돌 9단은 상대의 약점을 몰아치는 방식으로, 이창호 9단은 정확한 계산으로 이깁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마무리 법을 갖고 있는 거죠. 저는 아직 그게 약해요.”
○ 독사 vs 순둥이
최 9단의 별명은 ‘독사’. 독하게 상대의 돌을 잡으러 간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그러나 본인은 승부를 위한 ‘독기’가 부족하다고 한다. 실제 최 9단의 성격도 남의 요청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순둥이다.
“저의 바둑을 흔히 상대 돌을 때려잡는 바둑이고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오해예요. 프로기사들은 제 바둑이 그렇지 않다는 걸 다 압니다. 다만 대마 사냥에 성공한 바둑이 인상 깊게 남기 때문이죠. 하지만 팬들이 그렇게 보셔도 상관없어요. 팬들이 재미있으면 되죠.”
응씨배 우승 상금으로 5억 원 가까이 챙겼지만 그는 돈 관리는 부모님에게 맡긴다. 늘 200만∼300만 원의 잔액을 유지하는 통장이 그의 몫이다. 친구들 밥 사주는 물주 역할을 하는 것 말고는 돈 쓸 일이 없어서란다. 그에게 바둑에 대해 물었다.
“평생을 함께 가야 할 벗이죠. 내가 바둑으로 더 보여줄 게 없을 때 은퇴할 겁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