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철한 “응씨배 우승은 내 바둑인생의 전환점”

  • 입력 2009년 5월 21일 02시 56분


“하늘을 날고 싶다”최철한 9단은 바둑 외에 해보고 싶은 것으로 패러글라이딩 등 하늘을 맘껏 나는 것을 꼽았다. 최근 그의 바둑도 응씨배 우승으로 슬럼프에서 벗어나 반상 위를 훨훨 날고 있다. 사진 제공 한국기원
“하늘을 날고 싶다”
최철한 9단은 바둑 외에 해보고 싶은 것으로 패러글라이딩 등 하늘을 맘껏 나는 것을 꼽았다. 최근 그의 바둑도 응씨배 우승으로 슬럼프에서 벗어나 반상 위를 훨훨 날고 있다. 사진 제공 한국기원
■ 이창호 꺾고 부활한 최철한 9단

“4년전 결승서 패하고 방황 여자친구 도움 슬럼프 탈출

1인자 자리 올라서려면 나만의 ‘이기는 법’ 있어야

바둑은 평생 함께할 벗 더 보여줄게 없을때 은퇴”

“응씨배 우승의 가장 큰 소득은 자신감입니다. 그동안의 슬럼프를 떨어내면서 제 바둑 인생에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지난달 말 제6회 응씨배에서 이창호 9단을 3승 1패로 꺾고 우승한 최철한 9단(24)을 최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만났다. 그는 “인터뷰가 많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안 들어와 할 얘기가 많다”며 농담을 던졌다. 응씨배 우승으로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 5회 응씨배 vs 6회 응씨배

우승상금 40만 달러인 응씨배는 최 9단에게 무덤이자 부활의 장이었다. 최 9단은 2005년 5회 응씨배 결승에서 창하오 9단에게 1승 3패로 졌다. 결승 직전 국수전에서 이창호 9단을 3-0 스트레이트로 꺾어 자신감 100%로 출전했기에 충격이 더 컸다. 한때 1위였던 국내 랭킹도 10위권 밖으로 떨어졌다. 우승은커녕 세계대회에선 단칼 멤버(1회전 탈락)인 경우가 많았다. 기풍도 바꿔보고 공부도 열심히 해봤다. 하지만 페이스가 쉽게 올라가지 않았다.

“무덤에 누워있는 기분이랄까요. 뭘 해보려고 발버둥치는데 뜻대로 안 되니까 정말 답답했어요.”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과거의 영광이나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다시 ‘나만의 바둑을 두자’고 마음먹었다. 2008년 서서히 성적을 냈다. 슬럼프 탈출엔 1년 반 전부터 사귄 여자 친구가 도움이 됐다. “방황하고 있을 때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됐어요. 바둑계 사람이고요.” 인적사항을 더 캐내려고 하자 “여기까지만” 하고 말문을 닫았다. 결혼은? 이창호 9단이 가고 난 뒤에 생각해 보겠다며 웃었다.

6회 응씨배는 최 9단에게 부활의 땅이었다. 16강전에서 중국의 1인자 구리 9단의 거대한 대마를 잡고 이긴 것이 밑거름이 됐다. “이번에 우승 못하면 자포자기할 것 같았어요. 우승을 못하면 평범한 기사로 남을 것 같았죠.”

4강전. 중국의 류싱 7단은 호언장담했다. “최 9단의 기보를 연구했는데 (슬럼프 때와) 달라진 게 없다”며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최 9단의 마음가짐과 집중력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기보는 껍데기일 뿐이죠. 상대의 숨결과 손동작을 느끼며 직접 둬보지 않으면 상대가 왜 그 수를 뒀는지, 약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요. 기보로는 자기보다 약한 상대처럼 보여도 직접 마주한 경험이 없으면 승률은 반반으로 봐야 합니다.” 최 9단은 껍데기를 보고 자신하던 류 7단을 2-0으로 누르고 우승까지 이뤘다.

○ 이창호 vs 이세돌 vs 최철한

응씨배에서 최 9단의 제물인 된 이창호 9단은 최 9단에게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전체 전적은 23승 22패(최 9단 기준)로 호각이지만 타이틀전에선 응씨배까지 6번을 만나 5승 1패로 최 9단이 앞서고 있다.

“바둑은 상대적이에요. 상대 전적에서 밀리면 압박감이 생기고 그걸 제어하기가 쉽지 않아요. 이창호 9단이 저한테 그런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아요.”

묘하게도 이세돌 9단은 이창호 9단에게 성적이 나쁘다. 이번 응씨배 준결승에서도 0-2로 졌다. 그러나 최 9단은 이세돌 9단에게 약하다. 이창호 이세돌 9단처럼 1인자로 올라서기 위해 최 9단이 무엇을 더 보완해야 하는지 묻자 금세 “이기는 법”이라고 말했다.

“두 기사 모두 승부처에서 냉정하죠. 바둑을 정리해야 할 시점이 오면 이세돌 9단은 상대의 약점을 몰아치는 방식으로, 이창호 9단은 정확한 계산으로 이깁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마무리 법을 갖고 있는 거죠. 저는 아직 그게 약해요.”

○ 독사 vs 순둥이

최 9단의 별명은 ‘독사’. 독하게 상대의 돌을 잡으러 간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그러나 본인은 승부를 위한 ‘독기’가 부족하다고 한다. 실제 최 9단의 성격도 남의 요청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순둥이다.

“저의 바둑을 흔히 상대 돌을 때려잡는 바둑이고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오해예요. 프로기사들은 제 바둑이 그렇지 않다는 걸 다 압니다. 다만 대마 사냥에 성공한 바둑이 인상 깊게 남기 때문이죠. 하지만 팬들이 그렇게 보셔도 상관없어요. 팬들이 재미있으면 되죠.”

응씨배 우승 상금으로 5억 원 가까이 챙겼지만 그는 돈 관리는 부모님에게 맡긴다. 늘 200만∼300만 원의 잔액을 유지하는 통장이 그의 몫이다. 친구들 밥 사주는 물주 역할을 하는 것 말고는 돈 쓸 일이 없어서란다. 그에게 바둑에 대해 물었다.

“평생을 함께 가야 할 벗이죠. 내가 바둑으로 더 보여줄 게 없을 때 은퇴할 겁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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