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로… TV로… ‘네탓 증후군’에 빠진 대한민국

  • 입력 2009년 5월 26일 02시 56분


《#1.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면 그를 지키지 못한 너에게도 책임이 있어. 사랑을 방치한 건 부인으로서 너의 직무유기니까. 사랑이 변하지 않게 신경을 썼어야지.”(드라마 ‘아내의 유혹’에서 구은재 남편과 불륜을 저지른 신애리가 구은재에게 하는 대사)

#2. ‘내가 잘못되면 너 때문인지 알아/날 망치게 한 원인 모두 다 너니까/다른 사람을 만나 불행해주겠니/기도해 줄 테니.’(태양의 ‘죄인’ 중에서)》

연인과 헤어진 건 내 잘못이 아니다, 잘못되면 상대방 탓이니 되갚아준다. 난 피해를 봤을 뿐이다…. 요즘 TV 드라마와 인터넷에 이 같은 ‘네 탓(피해자) 증후군’이 확산되고 있다. 피해자 증후군은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자신은 주위 환경의 피해자라고 규정하는 사고방식”(김혜남 나누리병원 정신분석연구소장)이다.

대중문화에 침범한 피해자 증후군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드라마와 대중가요, 심지어 일반인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조차 네 탓하기 바쁘다. 전문가들은 △장기 불황 속에 잃어버린 심리적 여유 △정치권 등에서 시작한 편 가르기를 ‘네 탓’ 확산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 불륜도 범죄도 네 탓…복수 코드도 성행

최근 드라마들은 ‘상대방 흠집 내기 대회’에 가깝다. 이달 초 끝난 ‘아내의 유혹’의 등장인물이 대표적인 사례다. 신애리 정교빈 등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불륜은 물론이고 유괴나 절도, 살인미수 등을 저지르고도 뉘우침이 없다. 19일 종영한 MBC 드라마 ‘내조의 여왕’도 불륜의 원인을 상대 배우자에게 돌리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네 탓 증후군은 ‘앙갚음’ 심리로 이어진다. 김 소장은 이를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해 일어나는 스트레스나 분노를 남에게 되갚아주고 싶은 심리”라고 말했다. 최근 종영했거나 방영 중인 SBS ‘카인과 아벨’ ‘자명고’, KBS ‘남자이야기’ 등 많은 드라마에 깔려 있는 복수 코드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반인이 출연하는 TV 리얼프로그램에서도 ‘네 탓’ 싸움이 이어진다. 케이블채널 코미디TV의 ‘신해철의 데미지’나 엠넷의 ‘유건의 러브파이터’ 등은 불륜을 고발하거나 상대방 흠집 내기에만 몰두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가요에서도 이 같은 양상을 볼 수 있다. 과거 사랑이나 이별 앞에서 겸손했던 노랫말은 최근 들어 자기 위주로 변했다. ‘두 번 다시 바람 피지 마/네가 매달려 만난 거잖아/어떻게 날 두고 다른 여잘 만날 수 있니/내게 더 정말 멋진 남자들/가끔은 내게 다가와 흔들릴 때도 있어.’(다비치의 ‘사랑과 전쟁’) ‘왠지 모르게 난 참을 수 없었어/나만 봐주는 인형으로 만들고 나서/난 오직 너만의 주인처럼 놀고 싶어.’(휘성의 ‘우린 미치지 않았어’)

○ 편 가르기가 대중문화에 반영돼

박기수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이런 피해자 증후군의 원인을 ‘편 가르기 문화’에서 찾았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면 등을 돌리는 정치권의 문화가 대중문화에도 스며들면서 팬들도 아무런 부담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최근 드라마 구도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흑백 구도’에 치중하며 △연예계에서도 인맥과 ‘라인’을 따지는 경향을 이런 현상의 하나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패거리 문화로 약간의 손해에도 민감하게 구는 극단적인 이기심이 범람하는 사회의 모습이 대중문화에도 반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TV 드라마나 리얼 프로그램의 네 탓이나 복수심리는 모두 기존 현실이 투영된 결과”라며 “장기적인 불황 속에서 혼자 살겠다는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문화가 방송이나 가요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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