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흔해 희미해져 버린 일상의 존재들에 말 걸다

  • 입력 2009년 5월 28일 02시 59분


9년 만에 네 번째 신작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을 펴낸 송찬호 시인. 일상과 주변부의 구체적인 소재들을 동화처럼 풀어냈다. 사진 제공 문학과지성사
9년 만에 네 번째 신작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을 펴낸 송찬호 시인. 일상과 주변부의 구체적인 소재들을 동화처럼 풀어냈다. 사진 제공 문학과지성사
■ 송찬호 시인 9년만의 시집 ‘고양이가…’

송찬호 시인(50)은 말할 기회가 없던 것들에게 발언권을 준다. 고양이, 닭장 밑 두꺼비, 울타리 오이넝쿨 때로는 손거울이나 가방에게도.

“가방이 가방 안에 죄수를 숨겨/탈옥에 성공했다는 뉴스가/시내에 쫘악 깔렸다//교도 경비들은, 그게 그냥 단순한/무소 가죽 가방인 줄 알았다고 했다/한때 가방 안이 풀밭이었고/강물로 그득 배를 채웠으며/뜨거운 콧김으로 되새김질했을 줄/누가 알았겠냐고 했다”(‘가방’)

한때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온 힘껏 초원을 달렸을, 그러나 지금은 누군가의 손끝에서 흔들리는 그저 단순한 무소 가죽 가방. 주객을 바꾸자 잃어버린 세계, 사라져버렸던 자연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온갖 동식물과 무생물의 세계는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던 원시의 고향이기도 할 것이다. 김수영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한 등단 22년 된 송 시인이 9년 만에 신작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시인이 관찰하고 노래하는 대상들은 앞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사라져버린 사냥 시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고양이(‘고양이’)나 대양을 헤엄치는 고래(‘고래의 꿈’), ‘가다 멈춰 듣는 이 없어도 언제나’ 노래하는 드럼통 화분의 칸나(‘칸나’) 같은 것들이다. 병아리 찔레꽃 각시멧노랑나비 뭉게구름피어오름차 같은 아기자기한 소재와 발상은 종종 동화적인 재치와 포근함을 전해주기도 한다. 송 시인은 “사물이나 대상을 의인화하는 것은 고전적인 시작(詩作)법이지만 사람의 옷을 입혀 사물을 불러낼 때 재밌고 익살스럽게, 동화적인 요소들을 보태려 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만년필’)고 말하는 그의 언어가 가닿지 않는 곳은 없는 듯하다. ‘딱! 딱!’ 가을 콩이 익어가는 소리(‘가을’)도 들리고, 유년 추억이 한데 엉킨 아름드리 꽃들의 선연한 모습(‘백일홍’)도 보인다.

시인이 이렇게 되살려낸 것들은 대부분 현실세계에서는 주변부에 머물거나 존재 자체도 선명하지 않은 것들이다. ‘서기(書記) 된 자의 책무’로 평소에는 묻혀 있던 이들을 하나씩 호명하고 재생해 내는 가운데 방향성을 잃은 현대인과 ‘커다란 꿈’이 존재하지 않는 무기력한 시대에 대한 비판도 엿보인다.

“언젠가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코끼리 떼를 흰 종이 위로 건너오게 한 적이 있었다//…그들의 다리는 굵고 튼튼하다 포도주를 짓이겨 대지의 부은 발등에 붓고 거친 나뭇가지와 뿌리를 씹어 엽록의 공장을 돌리고 낫처럼 휘어진 거대한 비뇨기로 곡식을 베어 눕힌다//그들에게 실향이란 없다”(‘기록’)

때로 문명으로부터의 거리두기는 ‘참 시끄럽게 살았다’는 반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고보니 우리도 참 시끄럽게/살았다 그렇지?/까맣게 그을음 올라앉은 정짓간 천장/거기 쓸 만한 서까래 몇 골라내면/고요히 적막 한 채 지을 수 있겠다”(‘소나기’)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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