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의 사마천’ 홍길주의 재발견

  • 입력 2009년 6월 3일 02시 57분


항해 홍길주가 30∼50세에 쓴 시문(詩文)을 엮은 문집 ‘표롱을첨’의 표지(왼쪽)와 내용. 사진 제공 글항아리
항해 홍길주가 30∼50세에 쓴 시문(詩文)을 엮은 문집 ‘표롱을첨’의 표지(왼쪽)와 내용. 사진 제공 글항아리
《항해(沆瀣) 홍길주(1786∼1841)는 19세기의 대표적 문장가로 꼽힌다. 그는 ‘현수갑고’ ‘표롱을첨’ ‘항해병함’ ‘숙수념’ ‘서림일위’ 등 많은 저술을 남겼고, 당대엔 ‘중국의 사마천과 겨룰 만하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같은 시대 학자인 연암 박지원, 추사 김정희 등에 비해 낯설다. 최식 성균관대 연구교수는 “항해의 저서가 연구자들에게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동시대 다른 문인들의 위상에 가린 탓에 그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미흡했다”고 설명했다. 학계는 2000년대 들어 항해의 업적을 재발견하고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업적에 걸맞은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더 세밀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최 교수는 말한다.》

최식 교수, 생애-학문 연구서 펴내

명문가 출신이지만 벼슬 포기

평생 독서-저술에 매달려

19세기 대표적 문장가로

홍길주의 산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 교수는 일반 대중에게 홍길주의 생애와 학문, 철학을 알리기 위해 ‘조선의 기이한 문장’(글항아리)을 펴냈다.

항해의 형 홍석주는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고 동생 홍현주는 정조의 둘째 딸 숙선옹주와 혼인했다. 그런 쟁쟁한 가문 출신이지만 그는 26세에 과거를 포기하고 독서지사(讀書之士)를 자처해 일생 저술에 매진했다. 최 교수는 “외척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에 염증을 느껴 벼슬길을 포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독특한 가치관은 학문과 글쓰기 태도, 세계관에도 잘 나타난다. 그는 우선 ‘진짜 앎(眞知·진지)’과 ‘진짜 깨달음(眞覺)’을 중요시했고 여러 글에서 그런 생각을 표현했다.

“사람 중에 전에 알지 못한 것을 알고서 성급하게 스스로 안다고 여기는 자가 있다. 그러나 아는 것은 그침이 없다. 스스로 내가 아는 것이 이미 지극하다 여기는 자는 알지 못하는 자이다.”

항해는 또 독서를 강조했다. 최 교수는 “항해는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무생물만도 못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배움과 독서를 중요시했다”고 말했다. 항해는 또 “경전이 아니면 유익함이 없다”고 한 당시의 편협한 독서관을 비판했다.

“문장은 다만 독서에 있지 않고 독서는 다만 책에 있지 않으며 산천운물조수초목(山川雲物鳥獸艸木)의 사이와 일용의 자질구레한 사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독서다. 책을 펼쳐 몇 줄의 글자를 옹알옹알 소리 내어 읽은 연후에 독서했다고 여기는 자가 어찌 이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책에는 항해의 문장론도 잘 나타난다. 그는 문장이란 무엇인가를 말하는 글에서 “마음(心·심)에 확립한 것을 뜻(志·지)이라 하고, 뜻을 충만하게 한 것을 기(氣)라 하며, 기를 표현하는 것을 말(言·언)이라 하며, 말을 간추린 것을 문장(文·문)이라 한다”고 말했다. 문장이란 이런 단계를 거치면서 숙성된다는 뜻이다.

모방적 글쓰기를 싫어한 항해는 “옛사람이 했던 말을 취하여 그 글자를 바꾸어 수식을 더하는 것은 썩은 가죽에 문양을 넣고 마른 백골에 회칠을 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문장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본 문시활물(文是活物)을 강조했다.

“문장은 살아 있는 물건이므로 크게 할 수도 작게 할 수도 있으니, 저마다 그 제목을 따를 뿐이다. 가령 비속하고 더러운 물건을 제목으로 한다면, 모름지기 그 비속하고 더러운 모양과 똑같아지도록 힘써 사람으로 하여금 그 실물을 보는 것처럼 해야 한다.”

최 교수는 “항해의 저술은 개인적 글쓰기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사회 비판의 도구였다”면서 “군자가 깨닫고도 저술하지 않는다면 쇠락한 세상을 깨치고 후진을 징계할 수 없다고 항상 강조했다”고 말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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