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최성희, 로랑 페레이라 씨가 함께 설계한 ‘스틸 레이디’는 지하 1층, 지상 3층의 개인 주택이다. 철근콘크리트로 뼈대를 만든 후 화학 약품으로 부식 처리한 스테인리스스틸 패널을 단열재 위에 둘러 감쌌다. 반듯한 박스 형태지만 금속 표피 때문에 주변 남산 소월길의 다른 건물들 사이에서 돋보인다.
최 씨는 “높은 콘크리트 담장 안에 반듯하게 갇힌 이웃집과 달리 지나가는 이들에게 ‘이 건물이 뭔가를 말하려 한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며 “스틸 패널 위로 살짝 간격을 두고 그물처럼 엇갈려 둘러친 가느다란 스틸 바(bar)도 외벽 표면의 그림자와 반사를 다채롭게 만드는 요소”라고 설명했다.
금속 외벽에는 날씨에 따른 하늘빛의 변화, 계절에 따른 주변 나무 색의 변화가 그대로 비친다. 시시때때 민감하게 변화하는 집의 빛깔은 그물 스타킹을 연상시키는 스틸 바 격자와 더불어 건물 이름이 왜 ‘철의 여인(Steel Lady)’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금속 격자는 도로 쪽 창문 위를 덮어 행인과 집안사람 사이의 간격도 벌려 준다.
스테인리스스틸도 세월에 따라 색깔이 변하지만 정도는 미미하다. 구리의 변색은 이보다 뚜렷하다. 건축가 정현아 씨가 설계한 신사동 594-6 근린생활시설은 구리 피부를 가진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109m²의 좁은 땅에 지하 1층, 지상 5층 건물을 지어 임대상업시설과 맞벌이 부부인 건축주의 주거 기능을 겸하게 했다.
나무 널판을 잇댄 담벼락 표면처럼 길쭉한 구리 패널을 이어 붙여 외벽 전체를 둘러쌌다. 정 씨는 “구리는 세월의 흐름을 건축물에 새겨 넣고 표현하도록 만들어 주는 재료”라며 “주변과 은근히 구별되면서도 머지않은 미래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건물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블록 바깥의 상업구역이 더 넓어지면서 주거지역으로 침투해오고 있는 상황. 어두운 붉은빛의 구리 표피 건물은 거리의 어떤 변화에도 자연스럽게 섞여들 수 있다. 구리는 붉은 벽돌이나 노출콘크리트 외장 건물과 이물감 없이 잘 어울리면서도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나름의 개성을 드러내는 재료다.
본래 불그스름한 색을 띠는 구리는 비와 햇빛을 오래 받으면 커피 색깔처럼 어두운 빛으로 변한다. 10년쯤 지나면 짙은 회색이 됐다가 다시 30년쯤 뒤에는 청록색으로 바뀐다. 머물던 사람이 떠나고 내부 상업 공간의 용도가 바뀌면서 건물 외피도 점점 나이를 먹는 것. 세월을 새겨낸 금속 껍데기는 지나는 이에게 공간과 사람이 남긴 흔적을 들려주게 될 것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