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18년 동안 공주가 38명, 옹주(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의 딸)는 78명이었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들 중 가장 극적인 삶을 산 7명의 공주와 옹주를 조명한다. 태종이 서른여덟 살 때 태어난 늦둥이 정선공주의 혼인은 부마(임금의 사위) 간택(왕족 배우자의 후보자들을 궁궐에 소집해 적격자를 뽑는 일)의 시초였다.
태종 때까지 왕이나 세자의 배우자만 간택으로 골랐을 뿐 왕의 사위는 왕실이 직접 정했다. 간택 과정에서 후보자들의 혼인을 금지하고 궁궐로 오게 하는 등 민폐가 많았기 때문이다. 태종도 처음에는 간택 없이 춘천 부사인 이속의 아들을 사윗감으로 정했다. 그런데 이속이 이를 거부하는4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태종은 이속을 관노로 삼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태종은 간택을 통해 영의정 남재의 손자인 남휘를 사윗감으로 골랐다. 남재는 이미 늙어 권력에서 멀어져 있었다. 특이한 점은 남재의 형인 남은이 정도전과 밀착해 태종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태종을 정치적으로 고사시키려 했던 인물이라는 점. 어쨌든 태종 15년(1415년) 열세 살의 정선공주는 남휘와 결혼했다. 그런데 혼인 6년 만에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을 치르며 부부관계를 맺지 못하자 남휘가 노름과 여자에 빠졌고 정선공주는 스물한 살 젊은 나이에 죽었다. 행복하지 못한 삶이었지만 후손은 쟁쟁했다. 정선공주는 남이 장군의 할머니이자 신사임당의 증조할머니였다.
의순공주는 효종의 ‘급조된’ 수양딸이다. 효종 1년(1650년) 청나라의 섭정왕인 도르곤(多爾袞)이 조선에서 왕비를 찾았다. “왕의 누이나 딸, 왕의 가까운 친족이나 대신의 딸 중 정숙한 여성을 선발하라”는 것. 관료들은 딸을 보낼 수 없다며 물러섰다. 효종의 10촌 할아버지뻘인 이개윤이 열여섯 살의 딸을 보내겠다고 나섰다. 고마운 마음에 효종은 의순공주로 봉작했다. 대의에 순종하라는 뜻의 ‘의순(義順)’은 의순공주의 순탄치 않은 삶을 예고했다.
도르곤은 의순공주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역적으로 몰려 사후에 재산은 국가에 몰수됐다. 의순공주는 효종 2년(1651년)에 황족인 박락(博洛)의 부인이 됐다. 박락도 1년 뒤 세상을 떠났다. 우여곡절 끝에 7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오랑캐에게 몸과 마음을 더럽힌 여인으로 몰리다가 스물여덟에 병들어 죽었다.
조카 정조를 아꼈지만 정조가 왕이 된 뒤 대립한 영조 딸 화완옹주, 열네 살 때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도쿄에 유학한 뒤 대마도 번주(藩主)의 후예와 정략 결혼한 고종 딸 덕혜옹주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이겨내야 했던 ‘왕의 딸’들의 이야기가 절절하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